차창 밖으로 현란한 불빛들이 어른거린다. 밤은 깊어져가고, 범의 시간이 찾아온다. 야화, 밤의 꽃이 아니던가. 어둠 속에 개화하는 꽃은 온갖 더러움과 추악함을 집어삼키고, 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게 흔적도 없이 바스러지게 만들 터다. 평소라면 수많은 사랑의 말을 읊으며 단 한 명 만을 바라봤을 테지만, 지금만은 생각에 잠긴 듯 밖을 응시한다. 서늘하게 피부에 와닿는 감각에 범은 느른히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아아, 잡음이 드디어 사라지겠어. 귀에 거슬려서 죽겠던 참인데. 차가 멈춰 서자, 기쁜 듯 웃던 헤이화는 메이리엔의 손을 잡아들고 손등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내리기 전에 굿나잇 인사를 대신하듯 말이다.

 

“근 시일 내에 연락드리도록 하죠, 누님.”
“기대하고 있으마, 헤아.”

 

탁. 큰 소리를 내며 닫힌 차는 매끄럽게 빠져나갔고, 그 뒤를 한참 시선으로 쫓던 그는 이내 몸을 돌렸다. 집으로 들어가면서 그는 정장 재킷의 안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그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어떠한 감정도 실리지 않은 서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설중매의 수장, 셰 메이리엔에게 대하던 어투와는 확연히 다른 말투다. 3년간 좋다고 쫓아다닌 여인이다. 그녀가 웃는 표정을 보기 위해서라면 무엇인들 못할까.

 

“지난번 알아보라 지시한 주소로 사람을 보내요. 몇 놈이나 있는지 파악해서 보고하도록 해요. 아, 특이 사항은 즉각 나에게 알리고요. 알겠나요?”
[네, 알겠습니다.]

 

부하의 대답으로 통화가 끝나자, 헤이화는 그것을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던졌다. 피로가 무겁게 눈을 짓눌렀으나, 쉴 수는 없었다. 머리를 쓸어올린 그는 침대 옆 서랍을 열어 미리 조사해둔 은신처의 설계도를 살폈다. 이때를 얼마나 기다려왔던가. 배신자의 낙인이 찍힌 놈은 단 한 시도 은신처 밖을 벗어나지 않았다. 모든 물자의 조달은 부하들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팔락거리며 서류를 넘겨보던 그는 그것을 테이블 위에 던지고는 침대에 몸을 뉘었다. 수마가 범을 집어삼키려 들었고, 범은 실낱같은 의식을 간신히 부여잡고 있었다.

제 부하를 시켜 그것을 모두 파악하라고는 했으나, 그곳에는 혼자 들어갈 생각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혼자는 아닐 터다. 메이리엔 쪽에서 설중매의 사람들을 붙여준다 하였으니 말이다. 그들이 크게 도우리라 생각은 들지 않았으나, 범에게는 크게 걸리적거리지만 않으면 상관없었다. 이참에 맹수파 무리를 멋대로 굴려볼 수 있으니 오히려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띠링. 더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을 즈음이었다. 작은 알림 메시지에 헤이화는 제 휴대폰의 잠금을 풀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조금 전 지시를 내린 부하에게서였다.

 

[아직까지는 큰 움직을 보이지 않습니다. 수장님께서 찾는 자는 아직 은신처에 머물고 있고, 부하는 열다섯 정도는 됩니다.]

 

별다른 특이사항이 없다, 그것은 아마 제 위치가 노출된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의미일 터다. 일당백을 담당하는 레비아탄이 불을 켜고 찾고 있을 터인데 고작 열다섯의 부하만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안일하다. 일처리 능력이 부족하고 어리석은 이를 그는 좋아하지 않았다. 코웃음을 치던 범은 이만 철수하라는 명을 내리고 깊은 잠을 청했다.

 

*

 

날이 밝자, 그녀의 부름에 응해 온 설중매의 수하들이 야화의 수장, 레비아탄 앞에 서있었다. 야화의 사람들은 그들을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에, 아끼는 제 자식과의 충돌을 막기 위해 헤이화는 기꺼이 일찍 나서 다른 장소에서 접선하기로 했다. 물론 제 부하들에게는 사적인 업무로 자리를 비운다고 사전에 말해둔 이후였다. 서늘한 시선으로 그들을 훑던 범은 이내 고개만 까딱한 채로 앞장섰다. 메이리엔이나 제 부하들에게 대하는 것과도 완전히 다른 태도, 무관심하고 차갑기 그지없고, 살기를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설령 그것이 그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것은 곁에 있는 자로 하여금 섬찟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그것은 경고의 일종이었다. 제아무리 비앙카의 명을 받았다고는 하나, 고작 부하들에게 얕보여서는 안 된다는 레비아탄의 판단이었다. 힘의 논리로 지배되는 그들에게는 아주 잘 먹혀들었고, 범은 검은색의 정장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배신자의 은신처로 향했다.

생각보다 그곳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던가. 분명 그녀가 쥐잡듯이 뒤졌을 텐데도 나오지 않은 장소를, 헤이화는 끝내 알아냈다. 바닥을 나뒹구는 호위를 강하게 짓밟던 범은 제 볼에 튄 피를 닦아내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오갈 데도 없이 바르르 떨고 있는 사내는 이를 뿌득 갈았다. 고작 무리의 머리 주제에!!! 시건방진 새끼가!!! 설중매의 부하들에게 붙잡혀서도 입은 살아있는지, 제멋대로 지껄이는 사내를 보던 범은 이내 느른히 웃었다. 그다음 순간 콱! 하고 그의 턱을 강하게 잡더니 그 눈을 흉흉히 빛냈다. 그 붉은빛이 어찌나 공포함을 유발하던지.

 

“이런 구석에 처박혀 살아서 모르나 본데, 이미 야화는 정식으로 파벌로 인정받았다. 무려 2위의 위치에나 오른 엄연한 수장 레비아탄이다. 그 혀를 함부로 놀리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당신 같은 비겁한 개새끼가 뻔뻔하게 더 할 말이 남았나? 아직 살 만하나 보네?”

 

턱을 꽉 쥐던 손이 풀리기가 무섭게 헤이화는 크게 몸을 틀어 주먹을 내질렀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고통에 찬 신음소리가 튀어나온다. 얼굴이 제대로 돌아간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복부와 얼굴을 몇 번씩이고 일방적 폭력을 하고 나서야 분이 풀렸는지, 범은 제 손을 털었다. 마치 더러운 것을 털어내기라도 하듯. 그러고는 무심히 뒤돌아서며 입을 연다.

 

“…이만 돌아간다. 너희들의 수장에게로 안내해.”

 

일이 한차례 정리되고 나서야 헤이화는 제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메이리엔에게 돌아간다고 언질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메시지를 보내놓고 나서 그는 그들이 모는 차를 타고 눈을 감았다. 그가 탄 차를 따라오는 뒤 차량에는 그녀의 앞에 제물로 바칠 놈이 감시 하에 타고 있을 테다. 머리가 지끈 아파지는 탓에 헤이화는 느리게 눈을 떴다. 피로가 그를 집어삼킨다고 하더라도 이런 곳에서 눈을 붙일 수는 없다. 아무래도 설중매의 사람들 속에 있질 않던가. 범은 그렇게 왕좌에서 기다릴 그녀에게 향했다.

 

 

Posted by 가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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