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전쟁이 일어났다. 원인은 천마 전쟁과 마찬가지. 신의 피조물은 완벽하지 않았고, 결함이 생겼다. 그 결함의 결과가 버려진 감정들의 덩어리, 마물. 인간들뿐만 아니라 천마의 감정에서도 떨어져 나간 감정들은 천마계를 뒤흔들어 놓았다. 나약한 인간들을 희생시킬 수 없다는 것이 신의 판단, 해서 그는 해소하지 못한 감정의 덩어리들을 천마계에서 움직이지 못하게 발을 묶어버렸다. 그것이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을 고려하지 못한 채.


신은 인간을 관리하는 천마가 그들과 같은 감정을 느껴야 정확한 판단을 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여 그들에게도 인간과 같은 감정을 주었고, 그 영향으로 그들은 인간적인 면모를 가지고 살아갔다. 하나, 그들은 신의 권능을 물려받고 3000여 년의 세월을 살아갔기에 몇몇은 감정이 마모되어 사라지기도 하였다. 신은 그것을 매우 슬퍼하였다. 천마에게도 감정을 준 것이 잘못이었던가. 그저, 그들이 태어난 이유는 비단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행복이라는 것을 느끼고, 사랑스럽게 살아가기를 바랐다. 인간도, 천마도, 그에게는 모두 사랑하는 아이들이었다. 그런데 또다시 전쟁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그들의 지난 아픔을 달래주기 위해, 축제를 열었었거늘.


모순적이었다. 전쟁으로 천마가 죽으면,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은 마물들이 기승을 부렸으나 생겨나는 마물의 수 자체는 줄어들었다. 이미 존재했던 마물들이 천마를 죽이면 더욱 그랬다. 모든 것이 혼돈이었다. 무고한 희생은 늘어만 가고, 다시 온 대륙에 피바람이 불었다.


이러한 상황을 바꾸고자 한 이들이 있었다. 어느 쪽에도 서지 않고 중립을 지키는 자들. 혹자는 그들을 비겁하다고 힐난했다. 그리고 동시에 죽이지 않으면 결국 마물에게 삼켜, 영혼까지 소멸하고 만다, 그리 과격한 주장을 내어놓았다. 반대로 몇몇은 인간을 지키려고 하지 않는다며, 혀를 차는 이들도 있었다. 온건파와 과격파는 모두 중립파를 싫어했다. 그 모습은 인간들을 빼다 박아놓은 듯 닮아있었다. 신의 후회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뻔히 보이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제 뜻을 굽히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들의 중립은 ‘도망가기 위한 중립’이 아니었다.



「 세상에 죽어도 되는 생명체는 없다. 마물이 나타나는 원인을 찾고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다. 우리들끼리 싸우는 것은 의미가 없다. 」



그것이 그들이 말하는 중립, 그리고 정의. 제법 많은 자들이 그들의 편에 손을 들었다. 중립파에 속한 이들은 그들의 정의에 동의하거나, 전쟁에 지친 이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전쟁에 지친 이들 마저도 그들의 정의를 위해, 원치 않는 싸움에 달려들었다. 이 전쟁이 오래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 전쟁을 막기 위해, 적어도 최소한의 피해로 이 싸움의 막을 내리기 위해 싸웠다. 이미 시작된 전쟁을 말로 멈출 수도 없으니, 방법은 이뿐이었다.


“자, 전쟁은 시작되었다.”


중립파는 이 전쟁을 무희전쟁(無希戰爭)이라 불렀다. 천사든, 악마든 상관없이 인간을 죽이지 말자고 주장하는 온건파와 인간을 죽여 마물의 수를 줄이자고 주장하는 과격파가 대립했다. 각 기사단과 군에 속한 이들은 그들의 의지에 관계없이 상부의 명령을 따라 천사는 온건파, 악마는 과격파에 소속하여 싸웠다. 그 외에는 각자의 정의에 따라 움직였다.


“델타, 넌 팀을 이끌고 온건파를 맡아라. 그리고 나하트 가의….”
“말 안 해도 기억하고 있어, 대장. 굳이 상기시키지는 말아줄래~?”


전쟁이 난 이 판국에도 카시아 아리노엘은 웃고 있었다. 평소 같았다면 핀잔이라도 주었겠지만, 대장이라 불린 여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가 쓰라림을 숨기고자 만들어낸 가짜 미소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말이다. 제 가게에 맡겨진 애송이 하나를 바텐더로 만들 때부터 이어온 연이니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이어 고개를 돌려 등허리까지 웨이브가 진 백발의 여성을 향해 입을 열었다. 카시아와 상당히 닮은 미모의 여성, 이제는 일반인이었어야 할 악마에게.


“마리, 넌 과격파 쪽을 부탁한다.”


마드리아나 아리노엘, 그녀의 이름이 무너지지 않는 한 과격파의 기세를 꺾을 수 있을 것이다. 전장에서 싸울 것이라 생각지는 못했으나, 의지가 강한 그녀는 기꺼이 전쟁을 막기 위해 무언가를 상처 입힐 각오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그 상처에 대해 온전히 받아들이고, 제게 돌아올 모든 감정들을 받아들일 생각을 하였다. 회의실 내부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중립파의 대장이 해산이라고 크게 외치는 목소리를 끝으로 회의는 끝이 났다.


회의실을 나간 카시아는 제 창끝을 매만졌다. 온건파를 담당하겠다고 나선 것은 자신이다. 중립파에서 제일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온건파 리히트 소속인 엡실론, 오베론 나하트. 한때 이름을 날린 용병인 대장과 전 기사단장이자 용병이었던 마드리아나가 그렇게 판단했다. 그의 싸움 방식은 자칫 큰 피해를 불러올 수 있다. 극단적인 상황에 이르면, 오베론 나하트를 죽여야 할지도 모른다는 얘기까지 회의실에서 오르내렸다.



“디어의 사람을 죽여서 좋을 것은 없을 텐데.”
“그럼, 어쩌자는 건데?”
“걔는 내가 맡을게. 그럼 됐지?”
“죽을지도 모르는데?”
“안 죽어, 대장. 내가 누구 아들인데.”



그는 잇새로 새어 나오는 헛웃음을 삼켰다. 전쟁이다. 언제 어디서 죽을지도 모르는 운명 속에 오베론을 죽였다고 해서 나하트 가에서 복수 같은 것을 할 리가 없었다. 그저, 죽을 운명이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도 그를 죽이자고 말린 것은 카시아였다. 오베론 한 명을 죽이자고 다수의 희생을 낼 수 없다는, 그런 거창한 말을 늘여놓기는 했으나 실상은 그가 죽게 두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다른 이들이면 모르겠으나, 아는 이름이지 않던가. 처음 만났던 오베론은 그저 비틀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고, 기억이 온전치 못한 불쌍한 전투 인형이었다. 현재의 카시아를 있게 한 천사의 영향으로 세상을 넓게 보게 된 지금, 그는 더 이상 그것을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카시아.”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네, 어머니. 돌아보지 않아도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기란 참으로 쉬웠다. 모른다고 하면 오히려 이상할 정도지. 마드리아나는 가만히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슬픈 표정으로 제 아들을 응시했지만, 그는 그 시선을 애써 무시하려고 노력했다. 이제 와서 각오를 흐트러트릴 생각은 없다. 그렇기에 더욱 단단히 굳혀야 한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겠니? 그녀는 그 질문을 가슴속에 묻어두기로 했다. 그리 묻고 싶었다는 것을, 아들이 알아차릴 것이라 생각했다. 누구보다 눈치가 빠르고, 상황 파악을 잘 하는 아이였으니까.


“무리는 하지 말렴.”
“걱정 마세요, 어머니 아들이잖아요.”


카시아에게 있어 어머니는 누구보다 강한 존재였다. 그렇기에 그는 무사히 돌아와 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무너질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고, 그 얘기를 입 밖으로 꺼내면 그 법칙이 산산이 부서질 것만 같아서. 그가 모든 대답을 당신의 아들이라 일관한 것은 결코 쓰러지지 않을 것이라는 다짐과 마찬가지였다. 그것을 알기에 그녀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더는 예전의 약한 아이가 아니었다. 그를 믿어주는 것도 그녀가 해야 하는 일이었다. 느리게 숨을 뱉어내던 카시아는 제 어머니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하고서는 창을 고쳐 잡으며 일어났다. 이제 전장을 향해 나아갈 시간이다.



*



이미 오베론의 손은 피로 점철되어 있었다. 핏기 없고 단단한 손, 엉망진창이 될 때까지 제 몸을 마구잡이로 굴리는 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눈앞의 적들을 섬멸하고 있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은 적을 처리하기 위해 달려들 때, 챙! 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나하트 가의 특징인 어스름한 군청색의 머리칼, 호박을 닮은 주황색 눈동자 덕분에 단 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런, 벌써 한바탕 한 거야? 곤란한데, 그렇게 죽여대면.”


카시아는 창을 가볍게 한 번 휘두르며 오베론을 살폈다. 분명 오베론은 장총과 권총도 사용한다는 정보가 있었는데, 그의 손에 들려있는 것이 단검인 것으로 보아 총을 쓸 수 없는 상태까지 이르게 된 모양이었다. 그는 상황 파악을 하기 위해 잠시 행동을 멈춘 상태였다. 카시아는 그것을 알아차리고는 손을 살짝 휘저었다.


“엡실론, 나 기억하지? 난 싸우려고 온 거 아냐. 난 온건파도 과격파도 아니거든.”


카시아는 전쟁을 막으러 왔다는 소리를 에둘러 얘기했다. 그 말은 즉, 중립파의 일원이라는 소리였다. 그가 싸울 의지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오베론은 손에 쥐고 있는 단검에서 힘을 빼지 않았다. 오히려 더 힘주어 잡고 있었다. 중립파는 전쟁을 막으려는 자들, 그리고 현재 카시아는 그가 적으로 삼고 있는 자를 구했다. 그것으로 공격할 이유는 충분했다. 정말이지…, 말이 안 통하네. 그에게서 느껴지는 살기에 카시아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었다. 오싹하지 않다면 거짓이다. 그 역시 손에 힘을 주어 창을 쥐었다.


“이봐.”


낯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힘을 가지기 이전의 바텐더 델타라면 모를 법한 분위기를 풍기던 카시아는 날카로운 눈매로 뒤의 과격파를 흘겨보았다. 그가 자의로 과격파를 선택했든, 상부의 지시에 의해 과격파에서 싸웠든 그것은 상관없다. 오베론이 덤벼드는 순간부터 짐이 될 것이 뻔하다. 더구나 중립파인 그에게 덤벼들지 말라는 보장도 없다.


“목숨이 아까우면 빨리 도망가지 그래? 뒤통수 때리면 그때는 내 손에 죽을 테니까.”


그 말에 질겁했는지, 과격파 소속의 악마는 부리나케 도망을 쳤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카시아는 한숨을 내쉬다가 땅을 박차고, 창을 지렛대 삼아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아슬아슬한 차이로 달려든 오베론을 피하기는 했으나, 날지도 못하는 카시아에게 공중은 치명적인 허점. 오베론은 지체 없이 허공에 뜬 카시아를 향해 달려들었고, 카시아는 창과 팔을 이용하여 오베론이 팔을 쓰지 못하게 제압하고는 그대로 발로 그를 강하게 걷어찼다. 그러나 전투 경력에 있어서는 오베론이 우위에 있다. 경험도 그보다 많았고, 능력을 사용하여 통증을 모르는 오베론에게 그것이 쉽사리 통할 리가 없었다. 제압의 틈을 찾아 제 팔을 빼내고 카시아의 심장을 노리는 순간 걷어차이는 바람에 그의 다리에 상처를 남기는 것에 그쳤다.


묵직한 것이 땅에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일었다. 카시아는 창을 바닥에 내리꽂은 채 구부정하게 서있었고, 오베론은 언제든지 다시 달려들 수 있게 자세를 낮추고 있었다. 단검에 베인 다리의 상처가 쓰라렸다. 카시아는 낮게 조소했다. 죽이지 않고 무력화시키기란 매우 어렵다. 더구나 잘 훈련된 군견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진심을 다해서 부딪히지 않으면 역으로 자신이 이곳에서 죽을지도 모른다. 그것을 알고 있기에 카시아는 이를 꽉 깨물었다. 목표는 단 하나, 오베론 나하트를 무력화시킬 것. 그를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책은 그의 사지를 부러트려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 것.


휴식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뒤로는 끊임없이 무기를 부딪히며 싸웠다. 상대가 가진 것은 고작 단검 하나였으나, 경험의 차이는 카시아의 상상 이상으로 컸다. 체술이 훌륭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쉽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게 하는 것이 창이다.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러나 단검류에 비해 상대적으로 공격의 속도가 둔하다는 점, 그리고 호흡이 느껴질 정도의 근거리에서는 제 힘을 발휘하기 어렵다는 점을 이용하여 오베론은 그에게 자칫하면 죽음에 다다를 위협을 가하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대등하게 싸우고 있는 것으로 보였으나, 카시아가 압도적으로 밀리고 있었다. 그는 호흡을 채 고르지도 못한 채 창으로 찌르고, 휘두르며 소리쳤다.


“그게 네 정의야!? 계속 누군가가 명령하는 것을 듣는 삶을 살 거냔 말이야!”
“…명령보다 중요한 건 없습니다.”
“나하트, 넌 진짜 귀염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니까.”


캉! 날카로운 금속음이 한 번 더 크게 울리고 나서 뒤로 물러난 카시아는 숨을 토해냈다. 통증에 온몸이 아려왔다. 그는 한 쪽 무릎을 꿇은 채 창을 바닥에 꽂아야만 겨우 몸을 지탱할 수 있었다. 능력을 쓸까? 아니야, 그건 임시방편에 불과해. 통증을 알지 못한 채 지속하는 싸움은 오히려 몸에 독이 될 것이다. 카시아는 제 가슴께에 손을 얹었다. 이번 전쟁에서는 도무지 전에 산 물건이 효력을 발휘할 것 같지가 않아서, 가슴 쪽 주머니 안에 브로치를 넣어두었다. 미안해, 생각보다 일찍 갈지도 모르겠지만 조금만 더 지켜봐 줘. 혹시나 모르잖아, 기적이 내 편일지. 혹시 일찍 가더라도 너무 뭐라 하지는 마. 카시아는 다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미안하다, 나하트. 이게 다 널 생각해서 그러는 거니까, 이번 한 번 만큼은 이 형 말 좀 새겨 들어라.”
“……카시아.”


한 번 더 땅을 세게 발로 찼다. 창을 휘두르는 손놀림은 모순적이게도 더 빨라지고 치밀해졌다. 더 이상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이. 그에 반해 오베론의 움직임은 조금 전보다 더 둔해졌다. 카시아의 눈에 너무도 훤히 공격해야 할 허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인상을 찌푸린 그는 오베론의 표정을 살폈다. 여전히 전투에 임하고 있는 무표정한 모습이었다. 내가 말했지, 너 진짜 귀염성 없다고. 그들이 가까운 거리에서 싸우고 있어서 겨우 들린 목소리다. 이를 빠득 갈던 카시아는 창을 휘둘러 눈에 훤히 보이는 허점들을 공격했다. 그 공격이 날아올 것을 알고 있는 오베론은 그것을 피하지 않았다. 날카로운 칼날이 파고든 피부에서 새빨간 피가 공중에 흩어졌다. 그 피가 카시아의 얼굴에 튄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평소에는 정을 줄 것처럼 얘기하지 않았는데, 어째서 오베론이 이런 행동을 취하는지 카시아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가 보인 빈틈은 ‘그렇게 보이도록 일부러 보여준 것’이었다. 카시아 아리노엘이 오베론 나하트를 완전히 제압할 수 있게. 명령을 어기기 어려운 인형은 전투불능 상태가 되어 명령을 완수하고 아는 사람을 죽이기 싫다는 목적 역시 달성할 것이다. 이는 다른 사람이 아닌, 카시아 아리노엘이 이루어줄 것이다.


카시아는 이 모든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베론이 져주는 것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일부러 약점을 드러내고, 어떤 공격이 들어올지 알고 있는데도 피하지 않고 맞아준다는 것 자체가 대항할 힘이 없는 약자를 공격하는 기분이 들었다. 원래의 목적은 중립파가 꼭 해야만 하는 작전이자, 카시아 역시 수십 번이고 각오를 다지며 행하고자 했던 일이다. 그러나 마음은 좀처럼 편안해지지 않았다. 그는 일격을 가해 오베론을 쓰러트리고는 천천히 다가가 창을 땅에 내리꽂았다.


우드득. 사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손을 타고 전해져 오는 그 감각들이 미치도록 싫었다. 그가 결코 원하지 않았던, 누군가를 해치는 힘이었다. 그렇다고 하고자 한 일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모든 것은 오베론을 위한 것이라고, 그렇게 자기 합리화를 시도했다.


“감정을 배제해야 한다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된 오베론은 눈을 느리게 끔뻑이며 카시아를 향해 입을 열었다. 모든 것이 끝났다. 카시아는 그 옆에 털썩 주저앉아서는 움직이지도 못한 채 흙바닥에 누워있는 그를 응시했다. 끝까지 저런 소리나 하고 있지. 그 말이 못마땅한지, 카시아는 한숨을 쉬면서 제 포켓 안을 뒤졌다.


“시끄럽고, 잠이나 자.”


카시아가 미리 가져온 야구공 크기의 캡슐을 오베론의 이마에 세게 부딪히게 하자, 그것이 쉽게 터지며 안에 있던 노란색의 희뿌연 연기가 흩어졌다. 이게 무슨…. 말을 채 잇기도 전에 그는 무거운 눈꺼풀을 감고 잠에 들었다. 그 모습을 보던 카시아는 드디어 끝이 났다며 긴장을 풀었다. 근방은 죄다 오베론이 죽인 시체의 산더미였으나 그래도 전장은 전장이다. 그 한복판에서 긴장을 푼 채 늘어진 모습이라니, 우습기 짝이 없다. 그때, 불쑥 난입한 목소리가 그를 향했다.


“한 녀석은 많이 변했고, 한 녀석은 변한 게 없네.”


갑자기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카시아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시야에 들어온 익숙한 모습, 그러나 그녀가 풍기는 분위기는 낯설었다. 분명 죽었다고 전해 들었고 전쟁 전에는 기일마다 찾아갔었다. 있어서는 안 될 인물이 그곳에 있자, 카시아는 잠시 놀라다가 곧 낮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중립파에 녹빛의 머리칼과 눈동자를 한 여성이 있다고 전해 듣기는 했는데 설마 그게 몽블랑일 줄이야. 환생이라도 한 것인가? 그것도 이렇게 빨리? 카시아는 의문을 삼키고 어깨를 으쓱였다. 누군가를 해치지 못하고, 싸울 줄 몰랐던 악마가 변했다면 많이 변한 것이지. 침묵을 삼키는 것은 곧 그 말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오랜만이네.”
“감상에 빠져있지 말고 작은 사슴 데리고 얼른 빠져나가는 게 어때?”


근처에 마물이 어슬렁거리는 모양인지, 그녀는 쓰러진 마물들에게 꽂힌 화살을 빼내고 있었다. 빛이 일렁이는 화살은 능력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였다. 화살을 뽑다가 그것이 부러지자, 몽블랑은 욕설을 내뱉었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과 다른 탓에 넋을 놓고 있자, 바보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악마를 돌아보던 천사가 그를 바라보았다. 네 기억은 기억일 뿐이야. 그녀는 시선을 앞으로 돌리고는 폐허가 된 땅으로 다가오는 마물들을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카시아는 다음을 기약하며 오베론을 둘러메고 그곳을 벗어났다.



*



전쟁은 오래가지 않았다. 희생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으나 중립파가 최소한의 효율로 두 세력을 무력화시켰다. 사실상 기적에 가까웠다. 이후, 중립파를 중심으로 많은 연구원들이 모여 마물들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진즉 했어야 할 일이었다. 언젠가 다시 불러올 전쟁을 막기 위해, 그리고 그들이 마물의 피해 없이 살기 위해서. 폐허가 된 땅은 복구 작업에 들어갔다. 천마들은 바쁘게 모든 것을 되돌리기 위해 움직였다.


카시아는 그 혼란스러운 시기에 나하트 가를 방문했다. 한참을 고민했고, 자신이 그곳에 가도 되는지 수백 번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그러나 그를 구하겠다고 달려들었다. 오베론은 죽지 않았고, 당분간 군대로 돌아가지도 못할 것이다. 그가 일반인의 삶을 살겠다고 결심하면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겠으나, 당장에 능력을 써서 스스로를 잃어버리는 일은 생기지 않을 테니 카시아는 그것을 위안으로 삼았다.


다행히 나하트 가는 그를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그는 안내에 따라 오베론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문을 연 그곳에는 휠체어에 앉은 백회색 머리칼을 가진 청년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기척에 청년이 돌아보자, 카시아와 눈이 마주쳤다. 호박을 닮은 주황빛 눈동자가 있어야 할 자리에 밝은 아마조나이트 색의 눈동자가 악마의 자안을 응시했다. 어떻게 된 거지? 분명 외형으로 보나, 표정으로 보나, 틀림없는 오베론 나하트였다. 그런데 머리색과 눈 색이 저렇게 달라질 수도 있던가? 카시아는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자신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청년이 입을 열자, 그는 곧 답을 내릴 수 있었다.


“손님이십니까.”
“응, 손님이야.”


아무것도 기억을 못 하는 상태가 되었다. 단순히 카시아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기억이 죄다 소실된 것이다. 죄책감이 그의 가슴 한 편을 쿡쿡 찔러댔으나, 모순적이게도 오베론의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 편안해 보이네. 쉬고 있는 중이기에 그런 것 같습니다. 간결하고, 뚝뚝 끊어지는 대화 속에서 카시아는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자기 위안적인 구원은 결국 이기적일 뿐이다.


“누구인지 말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오베론의 목소리가 그의 상념을 깨트렸다. 여전히 자신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통에 카시아는 픽,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카시아. 카시아 아리노엘. 널 구해준 악마야.”


추억은 쌓으면 된다. 다시 잃어버리지만 않으면 된다. 능청스럽게 오베론에게 원래는 친했다는 이야기를 늘여놓으며, 카시아 아리노엘은 감당하지도 못할 구원이라는 이름의 늪에 제 몸을 던졌다.



Posted by 가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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