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꿈이었다. 단지 평화를 되찾기 위해 전력을 다했고, 자신을 희생할 각오까지 했는데, 결국엔 남은 것은 자신뿐이었고 주변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영원한 고독, 누군가가 꿈의 주인에게 내린 지독한 저주.

남자는 숨을 헐떡이며 잠에서 깨어났다. 기분 나쁜 감각이 그를 싸고돌자, 그는 작은 욕지거리와 함께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댔다. 제 기억에는 없는 꿈, 그러나 어딘가 익숙한 감정이었다. 기분 나빠-. 며칠 째 제대로 된 잠을 못 자다가 겨우 눈을 붙였는데 악몽을 꿔서 그런지, 그의 기분은 상당히 나빠 보였다.

「 그렇게 괴로워 할 바에야, 차라리 모든 것을 잊는 것은 어떤가ㅡ. 」

아아, 그래. 꿈속에서 누군가가 이렇게 말을 걸어왔었지. 기가 찬다는 듯 허- 하고 비웃은 남자는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저에게 괴로운 기억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선 주변을 살폈다. 한 줄기의 빛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커튼을 단단히 쳐둔 제 방을 살피다 그는 가벼운 미소를 걸쳤다. 그래봤자 꿈일 뿐인데 너무 깊게 생각하는 자신이 우스워서.

남자가 떠올린 꿈의 기억은 그저 일부에 불과했다. 무의식이 그것을 온전히 떠올리는 것을 방해라도 하는 듯, 떠올리려고 할수록 머리가 지끈 거릴 뿐이었다. 그는 제 앞머리를 쓸어올리다가 침대에서 일어나 의자에 대충 걸쳐둔 제 검은 로브를 휘둘렀다.

그가 제 방을 빠져나와 곧장 향한 곳은 검은 마법사의 방이었다. 군단장의 자리까지 올라있는 그는 충분히 검은 마법사에게 갈 자격이 있었고, 검은 마법사에게 있어 그는 꽤 유능한 인재였다. 남자는 제 로브를 펄럭이며 그 앞에 한 쪽 무릎을 꿇었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잠시 고개를 숙였던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며 제 앞의 이에게 시선을 두었다. 고요한 눈동자는 언제 파문이 일지 몰랐다. 검은 마법사가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제 아무리 자신의 마력이 강력하다고 하여도, 상대는 한 때 ‘영웅’이었던 자다. 쉽게 회유할 수 있었더라면, 자신의 시간이 수백 년 동안 멈춰있었을 리 없었다. 그는 천천히 입을 떼었다.

“너에게 새로운 임무를 주겠다.”

영웅들을 없애라ㅡ. 남자의 붉은 눈동자는 일순 흔들렸지만 이내 고요를 되찾았다. 어쩌면 그것은 이제껏 바깥 임무를 제게 맡기지 않은 그의 처사 때문이리라. 이제와 갑자기 새로운 임무를 제게 맡기는 것이 석연치 않았지만, 그는 그 의문을 속으로만 품을 뿐 입 밖으로는 내뱉지 않았다. 그의 속내를 꿰뚫기라도 한 듯, 검은 마법사는 한 쪽 입꼬리를 올리며 그에게 물었다.

“왜, 설마 못한다는 건 아니겠지? 자네를 꽤나 유능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말이야, 프리드.”

프리드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보다 숨을 내뱉었다. 아아, 당신이 시키는데 어떻게 토를 달겠습니까. 그저 신기할 따름이죠. 무엇이 신기한지, 검은 마법사 또한 잘 알고 있었기에 그는 반문하지 않았다. 그 탓에 프리드는 단순한 그의 심경 변화라 생각하고 크게 의미를 두지 않기로 했다. 프리드는 곧 몸을 일으켜 간단히 목례를 한 뒤, 다시금 제 로브를 펄럭이며 그 방을 빠져나왔다. 자신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

자신이 마주한 이들은 죄다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와 닮은 소년 하나만이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 그들은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너희들은 누구기에 그런 표정을 짓고 있지? 왜 슬픈 눈을 하고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거야.

“프리드, 너……!”

침묵 속에 입을 먼저 연 것은 엘프의 왕이라 불리는 메르세데스였다. 프리드는 그들이 왜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마치 악몽을 꾸던 그 때처럼 기분 나쁜 두통이 그를 장악했다.

“하, 하하… 재미없는 장난은 그만둬, 프리드.”

다음으로 입을 연 괴도 팬텀은 허탈하게 웃었고, 그 옆의 빛의 마법사-루미너스는 미간을 찌푸릴 뿐 아무 말이 없었다. 그리고 긴 고동색 머리를 하고 있는 남자는 그저 슬픈 표정으로 프리드를 응시할 뿐이었다.

“프리드…는 영웅들의 리더, 아니었어요?”

영웅들의 리더? 그 말에 프리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에반이랬나, 저 꼬맹이. 재밌는 소리를 하는군.

“푸하하-! 다들 멍청한 표정이나 짓고 있길래, 왜 그러나 싶었는데. 원래 영웅이란 집단은 말도 안 되는 헛소리나 하는 이들이었나?”

갑자기 웃어대는 그의 모습을 보고, 영웅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들의 앞에 있는 저 남자는 더 이상 그들이 알고 있는 영웅들의 리더 프리드가 아니었다. 이내 프리드가 웃음기를 없애고 그들을 노려보며 싸늘한 목소리를 내었다.

“나에게 그런 기억 따윈 없어.”

그리고 너희들 모두, 여기서 죽어줘야겠어.

*

자신의 방 안에서 그는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프리드가 영웅들과 대치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얼마나 재미있는 광경인가. 한 때 동료였던 이들끼리 서로 죽이기 위해서 달려드는 모습이.

“그대의 마법은 완벽하지 않았어. 그 탓에 나는 네게 말을 걸었지. 아아, 동료를 잃은 영웅을 세뇌시키는 일이 이토록 순조로울 줄이야.”

그는 웃음이 멈추지 않는 입술을 매만지며 쿡쿡- 거렸다. 자, 좀 더 나를 위해 일해 다오. 내가 사랑하는 그 비극을 위해서.

Posted by 가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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