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한 순간의 일이었다. 조용하던 상담실에서는 귀에 거슬리는 쇳소리만이 카랑카랑 울렸고, 순간적인 폭음에 귀가 멍해져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건장한 체격의 사내들이 줄을 지어 좁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고, 죄다 검은 정장 차림에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 마치 색이 사라진 공간에 갇힌 느낌을 주었다. 그 공간에서 퍼져 나오는 살기는 보이지 않는 검이 되어 턱 밑까지 밀고 들어왔다. 두렵냐고 묻느냐면, 그렇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했고, 그저 살인 현장을 운명적으로 목격한 유일한 증인일 뿐이다.
협박에는 응하지 않을 생각이다. 내가 그렇게 정의 넘치는 사람은 아니지만, 협박에 응하지 않으려는 것은 순전히 비굴하게 목숨을 부지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내 작은 오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는 충분히 두려움을 가질 수 있을 만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처음의 날카로운 총성에 놀라 바닥에 주저앉은 것을 제외하고는, 이상하게 떨리지는 않았다. 복잡할 것이라 여겼던 머릿속도 적막이 흐르자,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죽음 앞에서 무슨 용기가 났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저 천천히 눈앞의 두 사내에게 시선을 흘려보내고 있을 뿐.
두 사내는 다른 사내들에 비해 체구가 조금 작아보였고, 얼굴도 곱상하게 생긴 편이었지만 지위가 높은지 경직된 그들의 자세와는 달리 약간 어깨에 힘을 뺀 채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어차피 힘없는 상담사일 뿐인데, 뭘 그렇게 쳐다보는 건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특히나 한 사내는 나를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금발에 보랏빛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고, 침착하게 주변을 둘러보던 남자는 은발과 머리끝은 청색을 띄고 있었고, 벽안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잠깐 시선을 돌려 발치에 쓰러진 나의 내담자를 보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죽었다’고 말하는 편이 옳겠지. 그의 총상으로부터 나오는 선명한 혈흔은 어느덧 상담실 바닥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눈앞에서 보는 첫 죽음이라, 단연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더 보고 있다가는 속이 울렁거릴 것이라고 여겼기에, 나는 시선을 거둬, 그들을 노려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금발의 사내에게. 절대 호의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시선이 느껴지는 것이 분명한데, 이를 좋게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단 하나, 내가 간과한 것이 있다면 이 상황에서 우위가 있는 것은 상대방 측. 그러나 아까도 말했듯이 내겐 협박에 응해줄 마음은 어디에도 없다. 이대로 내담자처럼 차가운 죽음을 택하는 것도, 결국은 내 선택이 아닌가. 그는 내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순간적으로 짜증을 퍼부으려고 했으나 벽안의 사내가 저지하였다.
“잠깐, 아직 기다려.”
그는 침착하고 이성적으로 보였고, 간간이 바깥으로 향하는 시선은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금발의 사내는 입을 열어 짜증을 표했지만, 벽안의 사내는 조용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내 시선으로 봤을 때는 두 사람은 위아래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저토록 으르렁 거리면서 싸우는 것이겠거니, 추측할 따름이지만.
그래도 그들의 그림자 속에 숨어있는 누군가-존재 여부도 확실치 않은-가 더 큰 힘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살인 목격자인 나를, 나의 내담자를 살해했을 때처럼 곧바로 처리할 수 있었을 텐데도 벌써 저들은 한참을 망설였다.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몰라서라고 보기에는 저들의 뒤처리가 너무 깔끔했다.
그렇다면 생각해볼 수 있는 가능성은 두 가지. 필요에 의해서 살려두었거나, 누군가의 모종의 명령이 있었거나. 물론 후자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렇게 알려진 상담사도 아니거니와, 실력이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모종의 명령’이라면, 어떠한 종류의 명령이 내려졌는지 모르니, 그 가능성은 높았다. 추측할 수 없다는 것이 제일 큰 위험이지만.
적막한 시간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수천가지의 생각이 지나간 것으로 보아 많은 시간이 흘렀다고도 볼 수 있겠으나, 워낙에 이런 상념에 빠져있는 시간이 많은 편이었다. 얼마든지 짧은 시간 내에 수천가지의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직업의 영향도 무시할 수는 없었지만, 그것은 단순히 어릴 적의 습관이리라. 적막을 깬 것은 메마른 복도에 올려오는 구두 소리. 또각또각 소리는 점점 더 커지더니, 확실히 상담실 방향으로 오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바닥을 타고 느껴지는 미세한 진동이, 발걸음의 무게가 꽤나 무겁다는 것을 알려주는 듯하였다.
여성? 잠깐 머릿속에 의문이 지나쳐갔지만, 아까까지만 해도 신경질적이던 금발의 사내가 고개를 숙이고 예의를 차리는 모습을 보고선, 그들이 기다리던 사람이, 어느 덧 내 시선에 포착된 저 여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벽안의 사내도 그녀에게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까닥이고선 그들에게 고개를 들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무슨 까닭인지, 금발의 사내의 묘한 행동이 내내 거슬렸다. 아까와는 다른 차갑게 식은 눈동자와, 자신의 이로 입술을 묘하게 비튼다거나, 떨리는 손끝은 두려움 때문인지 분노 때문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지금 처지에 고려해야할 바도 아니거니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선 이를 가볍게 무시했다. 이내 내 시선은 곧 그녀에게 머물렀고, 금발에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가진 그녀는 입가에 재미있는 장난감을 찾은 것 같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녀의 표정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흥미, 호기심. 저 감정들이 얼마나 긴 시간동안 지속될 지 알 수 없었으나, 불현듯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너희들은 어떻게 하고 싶은데, 팬텀? 루미너스?”
그리고 나쁜 쪽으로의 내 예감은 이제까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
또다. 벌써 이곳에 온 지 상당히 시간이 지났는데도, 매번 악몽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었다. 방구석에 숨어있던 어둠이 점점 온 몸을 잠식해온다. 두려움이 한참 뒤에야 밀려온 것일까, 아니면 목숨을 부지한 것에 대한 죄책감일까. 이유는 알 수 없었다만 확실한 것 하나는 그 날의 일에 대해 내가 후회하는 것이 있다는 것.
진정되지 않는 가슴을 부여잡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차가운 공기가 머리를 차갑게 해주었고,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자 몸의 떨림이 멈췄다. 흰 셔츠 자락으로 식은땀을 닦아 낸 나는 천천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오늘도인가. 저렇게 새로운 정장이 준비되어 있는 날이면, 나는 항상 그녀를 만나게 되어있다. 아니, 이제는 ‘메르세데스 아가씨’라고 부르는 것이 맞겠지. 딱히 원해서 부르는 호칭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게 부르는 것이 싫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이를 거스르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그녀 덕에 목숨을 건졌기 때문이 아닐까. 모순적이라는 것은 안다. 그들에게 비굴하게 구는 것이 싫어서 협박에 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를 보는 순간 그런 생각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르르 녹았다. 그녀는 협박을 한 것이 아니다. ‘매력’을 뽐낸 것이지.
이유가 무엇이건 그녀의 호기심 덕에 살아 있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고, 나는 그녀를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그녀를 제외한 모든 조직원들은 그다지 환영해주는 분위기가 아니다. 오로지 그녀의 결정에 따라 이곳에 온 것이기에, 뒤통수가 따가운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온 공간을 때문에 메우는 갑갑한 분위기에 숨통을 조여 오는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다. 혼자서 1인실에 지내게 된 것은 불행 중 다행이리라.
내가 이곳에서 하는 일은 간단하다. 마피아 조직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아가씨와 말을 주고받는 것 정도. 실제로는 그녀의 장난감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그녀는 상담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은 채, ‘프리드’라는 인물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아마 첫인상이 뚜렷했던 까닭이겠지.
“…역시 좀 갑갑하네.”
눈앞의 전신 거울 속에 비치는 나 자신을 보며, 넥타이를 너무 조였나, 라는 의미 없는 생각을 한다. 이제까지 넥타이를 맬 일이 별로 없었던 터라, 익숙하지 않은 것이지만.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전보다도 더 어두운 느낌을 물씬 풍겼다. 마피아 조직이라니… 일반적인 상식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히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상식의 예외를 내게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 운명은 나를 이 조직에 속박시켰고, 제멋대로인 아가씨의 행동을 거부할 수 없게 만들었다. 어떠한 말도 통하지 않아서 만들어진 결과가 바로 이것ㅡ
똑똑ㅡ
“아가씨, 접니다.”
ㅡ아가씨의 상담역.
*
“어서 와, 프리드.”
얼핏 봐도 푹신해 보이는 소파에 앉아, 그녀는 밝은 표정으로 나를 반겼다. 나는 일부러 헛기침을 하며 넥타이를 매만지며 옷매무새를 깔끔히 한 뒤, 목례만 간단히 하였다. 바깥의 경호원들이 신경 쓰였지만, 그녀가 내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상 그들도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조용히 문을 닫았다. 달칵- 돌아가는 문고리의 소리가 내게는 여느 때보다 반갑게 여겨졌다. 벌써 이곳에 오고도 석 달. 오늘만큼은 그녀에게 사실대로 얘기해도 되지 않을까, 하고 조금은 무겁게 분위기를 잡으며 그녀의 맞은 편 소파에 앉으며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러나 그녀는 그 행동을 언제나의 겉치레로 여겼는지, 웃음을 터트리며 편하게 있으라고 얘기한다.
만약 그녀가 모든 사실을 알게 된다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딱히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조직 내부의 분열이라거나, 배신, 반대세력... 그저 모른 척 고개를 돌리면 그만이다. 오히려 무너지는 조직에서 발을 뺄 좋은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기엔 이미 내 마음은 온전히 그녀에게 종속되어 버렸다.
겉으로는 좋은 이미지를 쌓았지만, 내면은 깊은 수면 속으로 침전하고 있는 나와 달리, 그녀는. 그녀의 내면만은 찬란한 태양처럼 밝았다. 그녀의 외면과 내면이 나와는 정반대였기에 그래서 이토록 헤어 나올 수 없는 것일까.
만약 그녀의 성장 배경이 이런 어두침침한 곳만 아니었더라면 더 없이 티 없고, 맑은 여성이 되었으리라. 그녀는 수도 없이 많은 ‘죽음’을 봐왔다. 그리고 그런 장면을 목격하여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오히려 약간 즐기는 것처럼도 보였다. 삐뚤어진 그녀의 세계는 더럽고 추악한 공간이 만들어낸 모습.
그러나 그게 무슨 상관인가. 나 자신도 그 더럽고 추악한 공간에 발을 들여놓았고, 지독하게 싫었더라면 자살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은 어느 정도 내 의사가 개입되어 있다는 의미였다. 그녀를 탓할 문제가 아니었다. 어쩌면, 그런 모습의 그녀였기에 더 매력적이었을 지도 모른다. 내게는 불가능한 일. 같은 공간에 발을 디디고 있지만,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하는 나와는 달리, 수장인 그녀는.
“아가씨는 참 사람을 잘 믿는 것 같습니다. 언제 배신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인데도 말입니다.”
“어머, 그거 혹시 본인 얘기?”
“눈치가 없으신 건 여전하고요.”
얕은 한숨. 상체를 숙여 양팔을 다리 위에 걸치고 깍지를 꼈다. 시선을 그녀의 눈동자에 고정시킨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스스로 판단하고 본 모든 객관적인 사실들을.
분명 그녀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길 것이다. 지금 보여주는 그녀의 해맑은 표정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처음부터 그 누구의 신뢰도 얻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아가씨가 나를 신뢰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녀는 나보다는 그들과 함께한 시간이 더 길다. 그러니 그들을 더 신뢰하는 것은 당연한 사실. 허무감이 밀려온다. 하하, 당연한 것 아니겠어. 오히려 배신을 한다면 내 쪽이 한다고, 그리 생각할 것이다. 그녀의 부하들은 내가 심리에 대해 전문적 지식을 가지고 있는 편이니, 그 심중을 이용해 아가씨를 현혹시킬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할 것이다. 차라리 내가 생각하고 있는 시나리오가 아니기를 바랐다. 그러나 만약 내가 그리고 있는 시나리오가 사실이라면, 그 땐ㅡ
“그럼, 오늘은 이만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ㅡ그 날의 목숨을 사용할 생각이다. 어차피, 내 목숨은 그 날 ‘죽은 것과 다름없으니까.
내가 그녀를 뒤로하고 바깥으로 나갔을 때는 경호원들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에는 팬텀과 루미너스, 그리고 아란이 있었고, 팬텀은 여전히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문은 거의 닫혀 있는 상태였기에, 아마 아가씨의 시선에서 이러한 신경전을 알아차리지 못하겠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이번에는 어떤 타박이 기다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역시나, 내 예상을 깨지 못하고 팬텀은 내게 시비를 걸어왔다. 그녀에게 들리지 않게끔, 낮고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아주 팔자가 늘어 지셨구먼. 구차하게 목숨 구걸하지 않겠다더니, 그 때의 기세는 어디로 가고, 아가씨께 붙어 다니는 거지? 이런 식으로 사는 게 좋은가봐?”
이윽고 그는 거칠게 내 멱살을 쥐어 잡더니 벽으로 쾅- 밀어붙였다. 순간적으로 윽- 하는 소리가 입 새로 새어나왔지만, 미동도 하지 않았다. 숨통이 조여 왔지만,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심리적인 압박으로 조여 오는 것에 비할 바가 못 되었으니 말이다. 나는 그저 미간에 주름을 잡고 그를 노려보았다. 점차적으로 호흡이 조금 거칠어지기는 했으나, 육체적인 고통이 심리적 고통을 잊기에는 상당히 도움이 되는 경우가 있다. 나 또한 그 실례(實例) 중 하나였기에 오히려 감사할 따름이다. 충동적으로 비틀린 미소가 그려졌다. 단연 그의 미간은 티가 날 정도로 구겨졌다.
퍽!
고요한 복도에는 마치 수면에 잔물결이 생기듯 소리가 울려 퍼졌다. 순간 머리가 멍해지면서, 온 몸에 힘이 풀렸다. 다리 또한 예외는 없었기에, 제대로 설 수 없었고, 셔츠 자락이 목을 죄여왔다. 그런데도 그는 멱살을 놓아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뒤늦게 서야 볼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사실상 얼얼해서 통증인지 아닌지 분간하기 힘든데다, 머릿속이 멍해져서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내가 통증이라고 확신한 이유는 입 안에서 비린 맛이 났기 때문이었다.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은데다 그의 단단한 주먹이 내 얼굴을 가격했기 때문일까. 입술 쪽의 여린 피부는 쉽게 찢어져 입 안 가득 비릿한 향을 풍기었고, 살짝 흘러내리는 피를 나는 닦을 생각도 않고 그저 가만히 있었다. 그는 재수 없다는 듯이 흘겨보더니 잡았던 멱살을 놓고 방으로 휙- 들어갔다. 루미너스도 슬쩍 나를 보더니 그의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고, 그가 멱살을 놓은 순간, 나는 벽과 마찰을 일으키며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마치 안개가 낀 듯 모든 사물이 흐릿하게 보였고, 흔들리는 초점을 붙잡을 새도 없이 환각 증세를 보이는 마약을 투여한 듯 기이한 형상을 띄었다. 덩달아 의식도 흐려지는 것 같았다. 양안의 시력을 잃은 듯 일렁이는 세계는 이내 소멸할 것처럼 위태로웠다. 나는 희미하던 시선의 초점이 천천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대었다. 미미하지만 빗소리가 적적한 공간을 메웠다. 묘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저도 내 마음에 먹구름이 피어있다는 것을 알고 찾아온 동지일까. 하하. 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보다 더 비참할 수는 없다.
“난.......”
잠시 잊고 있었던 그녀가 나를 내려다보며 이야기한다. 이미 비어버릴 대로 텅 빈 눈동자가 공허하게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그런 것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말을 이어나간다. 한낱 동정이라. 그래도 예전엔 그런 시선은 받지 않았었는데. 참 많이도 바뀌었구나, 프리드. 이제 와서 스스로를 탓해보았자 이 상황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
“네가 결코 저들을 미워하지 않길 바라. 저들도 그리 나쁜 자들은 아니다. 나 또한 저들이 네게 대하는 태도는 마음에 들지 않다만, 그건 이쪽에서 사과하지. 그러니...”
변한 것은 세상이 아니다. 처음부터 세상은 이러한 형태로 굴러가고 있었으니, 변했다고 한다면.
“부디 이해해주길 바라.”
ㅡ그건 아마도 내 쪽이겠지.
*
날을 세우던 잿빛 성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와르르 무너지는 성벽 너머로 붉은 꽃의 향연이 펼쳐졌다. 분수처럼 솟아오르는 적혈, 끊이질 않는 외마디 비명. 고막을 찢는 소리에 남자는 귀를 틀어막았다. 그러나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갈라진 소리들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검은 공간에 널브러진 백색의 노이즈는 남자를 방구석으로 몰아넣었고, 처량하게도 그는 머리를 감싼 채로 웅크리고 있었다.
듣고 싶지 않아ㅡ
그의 어깨는 너무나도 작고 초라해보여서 보는 이들의 동정을 사기엔 충분하였다. 남자는 검은 공간을 점점 푸르게 물들였다. 그의 눈에서 나온 작고 투명한 것이 흘러넘쳤다. 남자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그렇다고 두려움에 떨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 이유는 분명하지 않았지만, 분명히 가야할 곳이 있었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누군가가 있었기에, 가지 않으면 안 됐다. 남자는 천천히 일어서 발걸음을 떼었다. 그 무게가 천근처럼 느껴졌지만, 걸음이 꼬이지 않도록 정신을 집중해야 했다. 공간을 찢고 나간 세상은 온통 불바다에 휩싸였다. 제대로 된 길도, 위치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단 한 사람만을 찾아 나섰다. 그토록 그가 사랑하던 한 여인을 위해서.
저편에 그녀가 있을까? 만나면 어떤 말로 진정시켜 줘야 하지? 이곳에서 살아나면 무엇을 할까? 다시 이런 생활이 지속되는 것일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수 만 가지의 의문들이 그를 휩싸기 시작했고, 그 의문의 끝에는 그가 찾던 그녀가 있었다. 그가 원하던 것과는 다른 형태로, 붉은 꽃의 일부가 되어서. 남자는 인정할 수 없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가슴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절규는 마치 짐승의 포효 같았다. 편안히 눈을 감은 채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의 최후에 어깨를 떨며 흐느꼈다. 그가 품에 안아도 빈 공간이 생길 정도로 여윈 그녀의 몸은 믿기 힘들 정도로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비이상적으로 흐려지는 정신 속에서 남자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ㅡ.
꿈에서 깨어났을 때는 온 몸이 땀에 젖어있었다. 이전의 악몽과는 다른 것이었다. 꿈에서 보았던 나 자신은 허무할 정도로 무력했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비극적인 세상은 처참히 무너져버렸고, 꿈속에서의 두려움이 지금도 몸을 엄습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두렵다. 도망치고 싶었다. 지금 시간이라면 보는 이들도 아무도 없을 것이다. 살고 싶다는 욕망은, 모든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본능이다. 그러나 뇌는 마지막으로 온 신경에게 명령한다. 도망쳐서는 안 된다고, 이 모든 것이 실현될지라도 결코 도망치기만 해서는 안 된다고. 맞서 싸우라고, 그렇게 내게 얘기를 한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내가 오늘 꾼 꿈은 단순한 무의식의 반영이 아니라, 앞으로 닥쳐올 일에 대해 강하게 경고를 하고 있다는 것을.
숨을 몰아쉬고 나서,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아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창밖을 보니 아직 이른 새벽 밖에 되지 않았고, 유리컵에 담긴 찬물을 마시고 조금 진정이 되었다. 그러고 나서 탁자 앞에 놓인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탁자 위에, 제일 아끼던 책을 집어 들어 책장을 천천히 넘겼다. 상담사가 되기까지 노력했던 흔적들과 형광펜 자국들, 이제는 닳아서 짧아진 책의 모퉁이와 오래된 책에 있는 낯익은 누렇게 변색된 종이들. 동이 틀 때까지는 매우 길고도 짧은 시간이었지만, 마지막인 만큼 과거의 시곗바늘을 돌려 아득하고도 행복한 시간 속에 녹아들었다. 그리고 온기가 세상을 덮어오자, 더 이상은 돌아오지 않을 행복한 추억 팔이에 미련을 떨쳐버리고 정장을 차려입었다.
*
상황은 생각보다 급박했다. 팬텀을 중심으로 한 반대세력의 전력은 그 수와 강함을 헤아릴 수 없었고, 갑작스러운 공격에 지지 세력들은 한순간에 무너지고 있었다. 복도에 쓰러진 그들만 해도 그렇다. 무엇보다도 조직에 충성해오던 그들의 행동에 오합지졸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 이외에 어떠한 대책도 세우지 못했다. 번져버린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렸고, 그 열기와 복도를 가득 채운 연기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제 몸에서 나는 열인 것처럼 착각을 안겨주어, 몸이 아픈 것만 같았다. 그러나 걸음을 멈추거나, 쓰러지는 일은 없었다. 내가 그녀를 찾기 위해서는 빗발치는 총성과 총탄이 오가는 복도를 지나가야만 했고, 그들의 장기전 따위 그 결과를 볼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이따금 피하지 못한 총탄이 팔과 볼, 다리를 스쳐지나갔다. 상처 부위가 쓰라렸다. 그곳으로부터 시작된 작은 고동들은 제 마지막을 고하듯 헐떡거렸다.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바닥으로부터 전해오는 전율이 고통을 더했다.
복도의 끝에서 모퉁이를 돌았을 때 즈음, 더 이상의 총성은 들리지 않았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그곳은 무수한 사체로 가득 찼고, 그 장면은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이었다. 꿈. 완전하게 일치하지는 않았으나, 내 불안감은 역시 현실이 되었다는 사실에 한 번 더 절망하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자신이 일찍 일어났다는 것. 그들은 평소와 달리 일찍 행동하였기에, 조금이라도 자신이 늦지 않는다면 꿈속의 악몽이 되풀이되지는 않겠지. 건물 깊숙이, 중심부를 향할수록 사람들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그런 점이 왠지 모를 안도감을 가져다주었다. 목숨의 위협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이 향하던 ‘목적지’와 가까워 졌다는 의미였다. 비록 지지 세력의 처세는 허술했으나, 그들이 분명 아가씨를 안전한 곳으로 모셨을 것이다. 그 속에 첩자가 있지 않은 이상, 그녀는 안전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 스스로 이 위험을 느끼고 몸을 숨겼겠지. 그녀가 항상 일하던 집무실은 분명 반대세력에게 이미 점령당했을 테니,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은 헛수고일 것이다.
하하, 목적지 없는 행보라니. 목적지가 완전히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래서야 안개 속을 걷는 것과 마찬가지잖아. 웃음이 터져 나왔다. 비웃음도 기쁨도 아니었다. 허탈, 허무. 그러한 감정들이 타들어가는 심정에 크게 자리했지만 아직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서는 안 됐다. 감정은 이성에 억눌려 제 위치를 찾아가지 못하였고, 방황하는 감정을 붙들어둘 수 있는 것은 또 다른 감정의 역할이었다. 억눌렸던 감정들은, 마지막 순간에 그 자유를 만끽할 수 있으리라.
“프..프리드??”
아아, 환청이라도 들리는 걸까. 총탄이 지나간 자리에서 나오는 피를 누르기 위해 오른 팔을 꾹 누르며 벽에 의지하여 걸어온 지 오래. 익숙하고, 그토록 찾고 싶었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이내 시야에 들어온 밝은 금발과 울상인 표정을 보고 진짜 아가씨라는 생각에 안도감이 놓였다. 일단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이곳에서 탈출하는 것. 탈출로는 진작 확보해두었다.
“메르세데스 아가씨...”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니, 스스로 위험을 느끼고 홀로 도망쳤으리라. 대충 짐작이 갔다. 지지 세력이 뿔뿔이 흩어져 그토록 당하고 있었던 것은, 그들을 진두지휘할 인물이 없었기 때문. 차라리 잘 되었다. 내가 그녀를 제일 먼저 만났다는 것은 그녀를 잔혹한 세계에 깊게 몸담게 하지 않도록 인도해줄 수 있다는 의미이고, 이제는 잔인한 동화 속에서 나와야 할 시간이었다.
“이..이게 대체...”
“지금은 설명 드리기 복잡합니다. 일단 이곳에서 벗어난 뒤 천천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일단...!”
탕!
복부를 강타하는 격통에 몸을 일으켜 세울 수 없었다. 다행히 총탄이 날아온 방향에서 사각지대로 몸을 던졌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쯤 격렬한 총알세례를 받았을 것이다. 총알은 분명히 내가 걸어왔던 방향에서 날아왔다. 미행을 당한 것인지, 우연히 걸어온 루트가 같았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총성이 울리기 직전, 순간적으로 인기척을 느끼고 코너를 돌며 그녀를 감싸지 않았더라면. 머리가 아찔해져왔다. 통증 때문이 아니다. 눈앞의 그녀가 연기처럼 사라질까봐, 내 손으로 붙잡을 수 없는 곳으로 가 버릴까봐.
“프리...!”
나는 오른 검지를 그녀의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거봐, 해냈잖아.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호흡이 가빠지는 바람에 옅게 그려진 수채화 마냥 희미한 미소였지만. 일렁거리는 시야가 어째 그 날-팬텀에게 맞은 날-과 같아서 우습기도 했지만, 결국은 그녀가 나를 믿어줬음을 그녀의 눈물을 보고 깨달았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날 믿어준 것이 아닐까. 그저 사실을 외면하고, 그들을 의심하고 싶다는 그녀의 안일함 때문일까.
저벅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잔잔히 귓가를 울렸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얼굴을 눈동자에 한가득 담으며, 힘껏 미소 지었다. 그녀도 어렴풋이 눈치 챘을 것이다. 이것이 그녀가 보는 내 마지막 모습이고, 이 미소가 절대 사라지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그녀에게 난 나지막하게 말했다. 괜찮을 거라고.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그리고 금방 그녀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그녀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따라 활짝 웃는 그녀의 얼굴은 눈물로 얼룩 져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힘겹게 일어나 내가 일러준 탈출로를 향해 내달렸다.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잠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은 시간을 벌었으려나.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고, 무거운 몸을 일으키려 겨우 벽을 짚고 일어서는데, 뒤에서 찰칵- 하는 차가운 금속음이 날카롭게 윙윙 거린다. 균형을 잡기조차 힘들어 벽에 손을 짚은 채 고개를 흘깃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싸늘한 총구가 세상과의 이별을 고하듯 나를 지명하고 있었고, 차갑게 식은 표정을 한 금발의 남성이 내 눈을 마주보고 있었다.
ㅡ팬텀.
벽을 짚고 돌아, 겨우 그를 마주하게 되자 그의 피 묻은 와이셔츠가 눈에 들어왔다. 아마도 그들이 패자라 여기는 자들의 혈흔일 터. 이제까지 팬텀의 옷에는 많은 이들의 목숨이 튀었을 것이고, 그는 그들의 시체 위를 아무런 감흥 없이 밟고 올라왔을 것이다. 그토록 많은 이들의 희생을 통해서, 저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이곳까지 추적해온 것으로 봤을 때, 그들은 아가씨를 죽이려고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가 죽음으로써, 차기 수장이 그들 중 하나에게 돌아가리라. 그리고 아마 그것은 팬텀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나는 틀렸구나. 첫날에 보았던, 루미너스와 팬텀 사이에 위아래가 없다는 것. 실제로 그들 사이에는 확실하게 ‘서열’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말이지. 이제껏 나를 괴롭히는 그를 말리지 않고 외면한 루미너스의 시선을 뒤늦게 깨닫고야 말았다.
“난 네가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그의 입에서 짜증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텅 빈 복도를 울렸다. 경멸에 찬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는 그의 눈빛은 매섭게 빛나고 있었지만, 내 시선에서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위치가 흔들릴까 두려워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째서 두려워하는 것일까. 상황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고 있다. 딱 하나, 달성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아마 아가씨의 목숨이 붙어있다는 것이겠지. 그가 나를 이토록 미워하는 것도, 어쩌면 ‘나’라는 존재로 인해 이 모든 계획이 무산되어 버렸기 때문에. 하지만 처음에 만났을 땐 왜?
“모든 걸 꿰뚫어보는 그 눈빛이 말이야.”
“나는 단지 그녀를 대피시킨 것뿐이야. 그래서 넌 그녀를 어떻게 할 속셈이지, 팬텀?”
스스로 알아낼 수 없다면 본인에게 직접 들을 수밖에. 가라앉은 목소리가 복도에 잔잔히 깔렸다. 미세하지만 내 목소리가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가 무사할지 걱정하면서, 간밤에 꾸었던 꿈을 떠올렸다. 잊어버리고 싶었다. 고개를 크게 휘젓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으나,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참았다. 그리고 조용히 뇌 속에서 이미지를 지워나갔다. 그럴 일은 없을 거다. 아직은 희망이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기에.
“글쎄- 마주친다면 당연히 죽이겠지? 아가씬, 처음부터 그 자리가 안 어울렸다고?”
팬텀은 정장 안주머니에서 하얀 손수건 하나를 꺼내 피로 얼룩진 총구를 닦으며 입술로 날카로운 호를 그렸다. 손수건은 곧 붉게 물들어갔다.
“내가 뭐 때문에 그토록 널 싫어한 줄 알아? 그 눈빛 때문이야. 내가 싫어하는 아가씨의 눈빛과 닮았어. 처음부터 느낌이 안 좋다고 하더라니, 결국 네가 모든 계획을 망가트렸어.”
“겨우, 그런 이유로 싫어했던 거야?”
“내가 감 하나는 끝내주게 좋거든.”
탕-
“윽....... 팬..텀.....”
총탄은 가슴팍에 박혔고, 휘청거리는 몸을 벽에 기대지 않으면 서있을 수 없었다. 폐에 구멍이 뚫렸는지 호흡에 지장이 생겼고, 머릿속은 새하얘졌다. 역시 불안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그 날에 내가 그녀 덕에 살았기에, 지금 그녀 때문에 목숨을 잃는다. 빠른 시일 내에 죽을 거라는 생각은 했었지만, 그 날이 이렇게나 빨리 올 지는 상상도 못했다. 팬텀이 가까이 다가와 머리채를 쥐어 잡으며, 고개를 들어 자신을 보게 하면서 냉랭하게 차가운 말을 던졌다.
“이제 그 꼴 보기 싫은 눈빛도 끝이야.”
차가운 시선, 떨려오는 몸, 주변의 한기들. 죽음이 몰려온다는 기분이 들자, 어째 기분이 묘했다. 자유로이 풀어질 것만 같았던 허무감과 허탈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졌고, 안락함이 찾아왔다. 그녀를 지켰다는 안도감과 그녀를 향한 연모의 감정. 죽음이라는 것이 이토록 평안한 것이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꿈속에 나왔던 핏빛의 붉은 꽃들은 현실에서 내 손에 의해 물들여졌다. 더욱 진한 색으로 한 가득.
“잘 가라, 애송이.”
탕-
-마지막 총성이 울리고, 세상은 나의 죽음을 고하였다.
'::2차 창작:: > 메이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메이플/흑프리프리]두 사람의 티타임 (0) | 2016.01.22 |
---|---|
[흑프리드]그가 사랑하는 비극 (0) | 2016.01.02 |
[흑프리드]증오하는 것 (0) | 2015.12.12 |
[메이플 전력 60분/프리드&아프리엔]친우를 위하여 (0) | 2015.12.12 |
[메이플/하마용병]piangere(피안제레) (0) | 2015.08.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