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 아닌 눈이 그의 로브에 내려앉았다. 붉은 로브가 하얗게 변하고 있음에도 그는 어깨에 쌓인 눈을 털어내려고 하지 않았다. 상당량이 쌓여 땅으로 떨어질 때까지, 그저 멍하게 하늘을 바라보았다. 모순적이었다. 대지는 불타고 있었고 하늘에서는 흰 눈이 기적처럼 내리고 있었다.


 

차라리 기적이었더라면. 프리드는 입김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이대로 모든 것이 얼어버린다면 차라리 마음이 편했을지도 모른다. 대마법사라는 이름을 칭하고 있으면서 이 저주를 풀 방법은 그에겐 없었다. 세계를 온전히 구하지도, 전우를 구하지도 못했다.


 

“아프리엔.”


 

난 이제 어쩌면 좋을까. 이미 잠들어 제 목소리를 듣지도 못하는 파트너를 불렀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마음이 진정되질 않아서.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차가운 왕의 곁에 기대었다.


 

“제발 뭐라도 좋으니 말 좀 해봐.”


 

그는 주저앉아 눈이 쌓인 바닥을 적셨다. 젖은 눈 주위는 더욱 더 단단하게 얼어버린다. 대마법사라는 칭호는 필요 없다. 드래곤 마스터라는 칭호도, 연합의 수장의 칭호도, 영웅들의 리더라는 칭호도 필요 없었다. 전우들이 살아 돌아오기를, 그저 자신의 곁으로 돌아오길 바랐다. 그러기엔 그 자신은 너무나도 무력했다.


 

증오스러웠다. 무능력한 저 스스로가 증오스러웠다. 자신의 능력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세계를 온전히 구하지도, 친우를 구하지도 못할 바에야. 그는 여린 손으로 대지를 움켜잡았다. 그의 손톱 끝에 핏방울이 맺혔다. 새하얀 대지는 마치 그의 로브처럼 붉게 물들었다.


 

‘무력한 너 자신을 증오해?’

 


어디선가 목소리가 울려왔다. 봉인되었을 터인 검은 마법사의 목소리인가? 그렇게 생각했던 프리드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의 목소리와 말투와는 다른, 좀 더 가까이서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검은 마법사의 수하인가? 프리드는 인상을 찌푸리며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주변은 불에 타버린 초원과 반쯤 얼어버린 대지뿐이었다.

 


‘부정하려 들지 마. 넌 이미 내가 누군지 알고 있잖아?’

 


나는 너의 거울이야. 네 어두운 면을 비추는 거울. 기분 나쁜 웃음이 주위를 가득 메웠다. 가뜩이나 친우들을 잃은 참인데, 슬퍼할 겨를조차 주지 않고 악마 마냥 그를 유혹한다. 어느 샌가 자신의 눈앞에 어른거리는 형체를 잔뜩 노려보며 얘기한다. 비록 제대로 된 형체는 없었지만, 기분 나쁘게 웃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너도 힘이 없는 네 자신이 싫은 거지? 미친 듯이 증오스러운 거지? 그렇다면 답은 간단하잖아?’

 


프리드는 그럴수록 눈에 더 힘을 주었다. 그런 힘 따위에는 기대지 않아. 입술을 잘근 깨물던 그가 작게 입을 열었고, 기이한 검은 형체는 갸웃 거리다 천천히 프리드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것이 한 걸음 씩 내딛을 때마다 그 외형은 점차 프리드를 닮아갔다. 비슷하면서도 닮지 않은 듯. 짙은 어둠과도 같은 흑발에 핏빛 눈동자. 날카로움을 품은 부드러운 붉은 눈빛은 프리드의 눈동자에 시선을 고정한 채 돌리지 않았다.

 


‘그런 힘? 강한 게 뭐가 잘못 돼서? 네가 동료들을 지키지 못한 것도 다 약해서 그런 거 아닌가?’

 


프리드는 인상을 찌푸린 채 눈을 감았다. 서늘한 기운이 그를 감쌌고, 소름끼칠 정도로 부드러운 손가락의 감촉이 그의 볼을 감쌌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칼이었다. 그것의 손가락이 제 턱을 들어 올리는 것을 느끼자 프리드는 가늘게 눈을 뜨며 살짝 그를 내려다보았다. 좀처럼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가 해야 할 말은 정해져있었지만, 하고 싶지 않은 듯 망설이고 있었다.

 


그것 봐. 말했잖아, 난 네 거울이라고. 그게 네 진심이야. 그를 비웃던 음성은 어느 덧 주변을 감쌌다. 그의 세계는, 까맣게 변했다.

 

 



*



 

 

“어…떻게‥”

 


떨리는 음성이 이어지지 못한 채 끊긴다. 시간의 신전으로 향한 영웅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그곳에서는 있어서는 안 될, 이미 죽었다고 알려진 남자가 있었으니 말이다. 사뭇 다른 분위기와 약간 변한 겉모습에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니, 다른 사람이다. 그들은 일제히 고개를 저었다. 사람을 죽이고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웃고 있다니, 그들이 알고 있는 프리드가 아니었다. 새하얀 피부는 온통 피로 범벅되어있고, 제 손에 묻은 피를 닦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 그는 손에 들린 시체를 툭 떨어트리고선 스태프를 가볍게 쥐었다.

 


“어서와, 친구들. 너희들이 소중하게 여기던 동료가 너희들이 ‘증오’하던 악으로 나타난 소감은 어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그들을 향해 프리드는 덧붙였다.

 


“나는 내가 증오하던 무력한 내가 사라져서 좋은데 말이지.”

Posted by 가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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