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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라는 말을 믿느냐 묻노라면, 모든 이들이 내놓을 대답은 제각각 다를 것이다. 천사를 만나지 못한 별, 아스테르에게 운명을 논한다면 허상이라 할 것이고, 따스한 봄을 맞이한 새신랑 아스테르 하르모니아는 기적이라 할 것이다. 사랑을 한 지 99년, 그들은 오랜 인연의 끝에 운명의 결실을 맺기로 약속했다. 달콤한 고백과 그에 대한 응답, 약혼으로 맺어진 관계가 이제는 완전한 부부가 된다. 그렇기에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 푸근한 겨울을 나고 있었다.
리오르가 프로포즈를 수락한 이후부터 그들은 매일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식장을 어디로 할지부터 시작하여, 날짜는 언제로 잡을 것이며, 청첩장에 웨딩 사진, 그리고 신혼여행까지. 해야 할 것들이 산더미였다. 그것에 우선순위를 붙이자면, 단연 결혼식장을 잡고 그 일정에 따라 결혼식 날짜를 결정하는 것이겠으나 처음이기에 서툴고, 한 번뿐이기에 그들은 제 바람을 담고 싶었다. 그렇기에 식장을 찾아보기도 전에 결혼식 날짜를 먼저 정해버린 것이겠지. 하나 그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봄이었다. 특히 리오르는 봄을 닮았다. 그는 쓸쓸한 가을만이 존재하던 아스테르에게 봄을 가져다주었다. 하나, 봄을 선물하는 천사에게도 겨울은 있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봄을 선물하고 나면 사무쳐오는 추위에 몸을 떨며 이불 속에 틀어박혔다. 너무 추워서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천사가 오지랖을 부리고 싶은 가여운 별에게 봄을 가져다주었을 때야 비로소, 천사는 그에게도 봄이 왔음을 알 수 있었다. 봄이란 이렇게 따뜻하고 행복한 것이구나. 따사로운 햇살은 이토록 간지러우며, 싱그러운 푸른빛은 이토록 포근한 것이구나. 하여 그들은 꽃이 만개하는 그들의 계절에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3월 24일, 참으로 결혼하기 좋은 날이었다. 혀끝에서 굴러가는 단순한 숫자 몇 개에도 다디 단 향이 느껴졌다. 스케치북에는 리오르가 갈색 사인펜으로 커다랗게 써놓은 결혼식 날짜가 있었다. 한창 성 씨를 짓고 있던 모양이었는지, 그 옆에는 고르고 고른 여럿 후보들이 적혀있었다. 정갈한 주황색 글씨와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갈색 글씨가 번갈아가면서 적혀있었고, 그중 몇몇은 이미 곱표가 쳐져 있었다.
“아스는 어떤 게 좋아~?”
숲의 밤은 빠르게 찾아온다. 밤은 추위를 몰고 오기에, 숲의 중턱에 있는 별장도 열외는 아니었다. 다락방이라면 그 추위가 더할 것이나, 별이 잘 보이는 다락방에 누워 이야기를 하는 로망 때문인지 바깥과 달리 내부는 따뜻했다. 별을 보다 잠이 드는 날에 추위 탓에 감기라도 걸리면 안 되니, 난방이 잘 돌아가게 해둔 덕이었다. 아직은 잠이 오지 않는지, 밤이 깊어지는 와중에도 다락방의 천사들은 불을 밝힌 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리오르는 신이 났는지, 이불 속에 들어가 엎드린 채 발을 흔들거렸다. 그럴 때마다 이불 아래쪽이 볼록 튀어나왔다가 들어가기를 반복했다. 그런 그가 문득 고개를 들어 아스테르를 바라보며 던진 질문이었다.
여전히 리오르의 손에는 갈색 사인펜이 들려있었다. 질문은 필시 그들의 성씨에 대한 것일 테다. 그것을 알고 있는 아스테르는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게, 어떤 게 좋을까? 그렇게 반문을 하던 그는 멈췄던 손을 다시 놀렸다. 한겨울, 따뜻한 침대 안에 들어가서 까먹는 귤이 맛있지 않던가. 껍질은 귤이 들어있는 바구니에 두고, 귤을 먹기 좋게 몇 덩이로 쪼갰다. 아스테르는 그것을 당연하다는 듯 리오르의 입에 넣어주었다. 그가 주는 귤을 받아먹으며 리오르는 배시시 웃었다. 맛있어? 응! 아스가 주는 거라 더 맛있어어~! 그래? 그럼 더 먹을래? 응!!! 리오르 더 주세요오오~! 가슴이 간질거리는 것은 비단 침대에서 느껴지는 따스함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루, 지금 정하기 힘들면 오늘은 이만 잘까? 밤이 늦었어.”
지나친 신중함은 도리어 독을 삼키는 것과 마찬가지일 터나,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통용되는 말은 아니다. 비교적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는 편인데다, 그들의 생애에서 단 한 번뿐일 소중한 시간이니,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것이 무어 나쁘랴. 고개를 끄덕이던 리오르는 사인펜의 뒤쪽에 꽂아둔 뚜껑을 뽁! 소리 나게 뽑아서, 조금 전까지 사용하던 스케치북과 사인펜을 정리했다. 그는 팔을 쭉 뻗어서 침대 옆 탁상 위에 그것들을 가지런히 올려두고는 마치 애벌레처럼 이불 속에서 꾸물거리며 몸을 바로 하여 누웠다. 베개를 바로 눕힌 아스테르 역시 전등용 리모컨의 스위치를 눌렀다. 삑, 한 번 누르니 다락방의 불이 꺼치고, 삑, 두 번을 누르니 다락방의 천장에 무수한 별들이 밤하늘처럼 수놓아져 있었다. 언젠가 아스테르의 제안으로 달아두었던 것이다. 별이 잘 보이지 않는 밤이면, 이 별들을 보며 잠들자고.
다행히 오늘의 밤하늘은 아름다운 별들이 총총히 박혀있었다. 제 옆을 팡팡 치는 리오르를 보며 피식 웃던 아스테르는 리모컨을 탁상에 두고서야 따라 누웠다. 진짜 별이 보이는 날은, 천장에 무수히 많은 별들이 있다고 해도, 작은 창 너머로 보이는 별을 보고는 했다. 그것을 보던 아스테르가 문득 입을 열었다. 길을 잃은 여행자에게 나아가야 할 길을 알려주는 별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아스테르에게 길잡이별은 리오르이고, 리오르에게 별은 아스테르였다. 서로를 돕고, 어려움을 헤쳐나가며 앞으로 나아간다. 그것이 그들이 써 내려간 이야기이며, 그들만의 역사이다.
“루, 우리 성 말이야. 하르모니아는 어때?”
정하기 어렵다면 미루자고 얘기한 것은 다름 아닌 아스테르였다. 그런 그가 먼저 서두를 꺼낸 것에 리오르는 고개를 돌려 그를 보며 눈을 연신 깜빡거렸다. 때로는 그런 순간이 있다. 무언가를 결정할 때, 그것이 마치 운명인 것처럼 이유 없이 끌리는 순간이. 그것을 과연 충동적인 결정이라 부를 수 있을지는 애매한 것이나, 결코 그 선택이 신중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신중했기에 여러 후보를 고랐으며, 빨리 결정을 내리지 못해 머리를 싸매며 몇 날 며칠을 고민했던 것이니까. 갑자기 심경의 변화가 생긴 것은, 필시 저 하늘에 박힌 별들 탓이라.
인간들 사이에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하르모니아는 조화와 화합, 그리고 균형을 상징하는 신이라 전해진다. 그 이외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는 없다고 하나, 그것만으로도 그들에게 퍽 어울렸다.―같은 이름을 가진 또 다른 여신은 그리스․로마 신화와 깊은 연관이 있다고는 하나,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 여신의 이름이 가져다주는 조화와 화합, 균형이라는 의미뿐. 하여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아스가 좋으면 리오르도 좋아! 하르모니아 부부~? 장난기가 어린 목소리에 아스테르도 키득거리며 웃음을 자아냈다. 때마침, 세상을 보여주는 작은 창 너머로 새하얀 축복이 포근하게 내려오기 시작했다. 포근하게 내려오는 눈발을 보며 그들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고, 며칠 후, 그들은 정식으로 같은 성 씨를 가지게 되었다. 그날은 청첩장에 들어갈 그들의 정식 이름이 결정된 날이다.
*
어느덧,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함께 넘겨온 해만 벌써 99번째이나, 두 천사에게는 감회가 새로웠다. 그들이 함께 지내온지 100년이 되는 해를 맞이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의미이며, 동시에 그들의 결혼식도 머지않았다는 것이다. 어제보다는 날이 조금 풀려 따뜻한 편에 속했으나, 겨울은 이제부터 시작이기에 주위에 흐르는 냉기에 아스테르는 몸을 부르르 떨며 집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우편함 안에 들어있던 편지 몇 개와 전단지 몇 장을 가지고 들어왔다. 그것을 하나, 하나 살피던 도중 유독 그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에 슬리퍼를 신은 발이 우뚝 멈춰 섰다.
“루, 우리 여기 가보는 건 어때?”
“응? 어디, 어디이~?”
리오르는 한참 거실의 테이블 앞에 앉아서 새하얀 공책에 빼곡하니 ‘리오르 하르모니아’와 ‘아스테르 하르모니아’를 쓰고 있었다. 성 씨가 생긴 것이 신기하다고 공책에 이름을 쓰기 시작한 것이 벌써 몇 번째인지. 작게 웃음을 흘리던 아스테르는 이내 고개를 들며 저를 보는 시선에 조금 전 제 시선을 사로잡은 전단지를 건넸다. 그것은 그들이 무엇보다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결혼식에 큰 도움이 될, 웨딩 박람회 홍보 전단지였다. 인근의 컨벤션 센터에서 진행되는 웨딩 박람회는 주말이 시작되는 내일부터 대략 일주일 간 진행되는 대규모의 행사였다. 일반적인 박람회는 대게 3일에서 많으면 4일 정도로 진행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 말이다. 이유를 막론하고 예비부부에게는 참으로 설레는 일이 아니던가. 덤으로 청첩장에서부터 식장, 웨딩 정장, 웨딩 촬영, 신혼여행 등 정해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그들에게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리오르는 눈을 빛내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거렸다. 응!!! 리오르 가고 싶어!!! 이스랑 갈래에~!!! 척 보기에도 그가 좋아라 수락한 것은 에비 부부로서 박람회에 참가하는 것이 설레는 이유 탓이라. 그를 익히 알고 있는 아스테르는 사랑스러운 연인의 뺨에 입을 맞추어주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방방 뛰던 리오르의 얼굴이 타오를 것처럼 달아오른 것은 덤이었다.
“내일 박람회에 일찍 가려면 얼른 자야겠다. 그렇지?”
고개를 끄덕인 리오르는 발그레해진 뺨을 양손으로 감싸더니 몸을 배배 꼬며 아스테르의 품에 폭 안겼다. 곧 1월이 다가온다. 지금부터 결혼식 준비를 하기에도 빠듯한 시간이었으나, 그들은 너무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무엇을 준비하든 서두르다가 일을 그르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프로포즈가 늦었고, 결혼식을 올릴 날짜도 이른 편이었으나 착실히 준비하면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금전적인 면은 이미 차고 넘칠 정도로 넉넉한 것도 한몫을 했다. 대규모 행사이니만큼 이번 박람회가 그들의 걱정을 덜어줄지도 모를 일이고 말이다.
고대하는 마음으로 잠든 날의 밤은 짧았다. 겨울의 밤이 길다 하나, 그들의 아침은 빠르게 밝아왔다. 웨딩 박람회는 생각보다 본격적이었다. 이미 몇 번의 도서관 행사로 인해, 컨벤션 센터를 섭외해본 적 있는 그들이었기에 박람회 개최 장소가 크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막상 입장을 하고 난 뒤의 펼쳐진 광경은 그들의 입을 쉬이 다물지 못하게 만들었다. 화려한 웨딩드레스와 웨딩 턱시도가 진열된 것을 비롯하여, 커다란 탈의실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옷을 입어보고 난 이후 촬영을 할 수 있는 포토존도 마련되어 있었다. 부스 앞에는 맞춤 제작이 가능하다는 문구가 커다랗게 붙어있었다.
그 옆에는 각종 스튜디오 부스들이 있었다. 부스 앞에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신혼부부들의 사진이 진열되어 있었고, 안쪽에서는 웨딩 앨범에 대한 상담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그 이외에도 결혼식장에서 나온 웨딩 플래너들이 예비 신혼부부들의 상담을 해주거나, 신혼여행과 관련된 정보가 담긴 팸플릿이 늘어진 여행사 부스, 예비 신혼부부에게 선물하기에 좋은 물건들―가판대에 전시된 것은 대게 향수나 드라이플라워 같은 것이었다. 아주 간혹, 결혼식 하면 상징적으로 떠오르는 하얀색을 메인 색상으로 하는 드림캐처를 판매하기도 했다.―을 파는 부스, 신혼집 인테리어 부스, 청첩장 업체 부스, 궁합 및 타로 부스들이 즐비해있었다.
정신이 없는 그들이 어디로 가야 할지 망설이고 있을 때, 리오르가 여러 부스들 중 한곳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의 시선이 향한곳은 마네킹에 전시된 웨딩 턱시도가 있는 방향이었다.
“아스 저거 입어? 지금 입어볼 수도 있어?”
시선을 옷에 고정시킨 채 말하는 리오르의 목소리는 잔뜩 들떠있었다. 새삼스레 결혼이 머지않았다는 것이 실감이 났는지, 아스테르는 낮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럼 물어볼까? 귓가에 내려앉은 목소리가 달다. 리오르는 아스테르의 손을 잡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제 커다랗고 단단한 손에 쏙 들어오는 작고 부드러운 손에 살풋 웃던 아스테르는 그와 함께 부스 가까이 다가갔다. 직원들은 친절하게 새로 온 고객에게 인사를 건넸고, 아스테르는 마네킹을 가리키며 턱시도를 입어볼 수 있느냐 물었다. 직원들은 흔쾌히 긍정의 답을 내놓았고, 아스테르를 탈의실로 안내해주겠노라 하였다. 조금 있다가 봐. 고개만 살짝 옆으로 돌린 채 손을 가볍게 흔들어주며 미소 짓던 그가 무대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아스테르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던 리오르는 곧 다른 직원의 안내에 따라 새하얀 소파에 앉았다. 앉자마자 정면에 있는 커튼을 보고 있자니, 직원은 탈의실로 간 아스테르가 환복 후에 저 커튼을 걷고 나온다고 설명해주었다. 그가 들어간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은 알고 있으나, 당장이라도 보고픈 마음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심장을 울리는 박동이 크게 들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리오르는 긴장을 풀기 위해 시선을 아래로 내려 투명한 테이블 위에 있는 앨범을 펼쳤다. 별다른 생각 없이 펼쳤던 앨범 속에는 다양한 디자인의 웨딩드레스와 웨딩 정장이 있었다. 오랜 트라우마로 아직까지 목 끝까지 단추를 채우는 와이셔츠 종류는 입지 못하는 터라 디자인에 특히 신경을 써야만 했다. 한참 고민을 하며 페이지를 넘기던 그의 손이 우뚝 멈췄다. 와이셔츠에 케이프를 접목한 독특한 스타일의 웨딩 정장 사진이 있었던 탓이다. 케이프는 꽉 끼지 않는 디자인이었기에, 조금 큰 치수의 셔츠를 입고 맨 위의 단추를 잠그지 않으면 된다. 일반 와이셔츠면 쉽게 벌어져 맨살이 보일 수도 있겠으나 차이나 카라를 입으면 조금이라도 가릴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품이 넉넉한 옷을 선호하는 그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선택지였다. 아스테르가 나오면 제가 생각한 바를 전하겠노라 다짐한 리오르는 직원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이제 곧 애인분 나오세요.”
조금 전까지 앨범을 보고 있던 리오르는 잊고 있었던 긴장감이 되살아났는지 바짝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새하얀 커튼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촤라락. 커튼이 걷히고, 검은색 턱시도를 입은 아스테르의 모습이 드러났다. 포켓에는 흰색의 손수건이 세팅되어 있었고, 평소에는 하지 않는 하얀색 나비넥타이를 하고 있었다. 그저 옷만 걸쳐본 것뿐이라, 화장을 하지도, 머리를 세팅하지도 않았는데 그 미모를 숨길 수는 없었다.
리오르는 제 가슴을 움켜쥐었다. 심장이 쿵, 쿵 울리고 주변의 소란스러운 소음은 고동 소리에 묻혔다. 그 떨림이 쉬이 진정되지 않았는지, 리오르의 하얗고 보드라운 두 뺨은 발갛게 물이 들었고, 빛을 품은 눈동자는 훤칠한 새신랑의 모습을 담았다. 그렇게 멍하게 있기를 잠시,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는 곧 허둥대며 제 휴대폰을 꺼내들며 손을 휘적거렸다.
“…! 사진! 아스, 리오르 사진 찍어도 돼~?”
“뭐어? 푸하하하!”
허락을 받지 않아도 되는 것을 물어본 탓인지, 아스테르는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렇게? 그는 옷매무새를 살피더니 자연스럽게 포즈를 취하며 당연하다는 듯 행동했다. 휴대폰 프레임 안에 들어온 그의 미소는 꾸며낸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어떤 천사가 저렇게 아름답게 미소를 짓는단 말인가. 한 장의 화보와도 같은 모습이었으나, 그것은 행복이라는 기적에서 비롯된 표정이고 행동이다. 찰칵, 찰칵. 지금 이 순간만은 사진사가 된 리오르는 연신 촬영 버튼을 누르며 멋진 모델의 사진을 남겼다. 아스테르의 패션쇼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부스에는 그 이외에도 여러 웨딩 정장이 있었기에 리오르는 그에게 어울릴 것 같은 다른 옷들도 몇 벌 골라주었고, 그럴 때마다 아스테르의 사진을 휴대폰에 남겼다.
그것은 리오르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스테르는 그가 입을 수 있는 옷들 중 어울릴만한 디자인을 골라주었고, 이번에는 반대로 리오르가 탈의실을 몇 번이고 들락거렸다. 그 과정에서 리오르는 아까 생각해둔 웨딩 복장에 대해 이야기를 늘여놓았고, 아스테르는 그를 수긍하여 부스의 직원과 상담을 진행하기에 이르렀다. 리오르가 생각하는 디자인의 옷을 제작하는 것에 큰 어려움이 없다는 대답에, 그들은 차후에 매장에 방문하기로 약속했다. 상세 디자인에 대한 상의 및 맞춤 제작을 위해서라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인 셈이다.
점심을 든든하게 먹었는데도, 그 많은 곳을 한 번에 돌아보기는 힘든 모양이었다. 결혼식장은 어느 곳이 더 예쁘며, 결혼식 이후의 일정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는지를 꼼꼼히 비교한 후에 결혼식장을 선정하고, 차후에 웨딩 촬영을 맡길 스튜디오와도 이미 대략적인 일정을 짜두었다. 다양하고 어여쁜 디자인의 청첩장을 보면서 어떤 업체에 청첩장을 맡길지도 정하였으며, 디자인과 날짜 및 일시는 차후에 논의하는 것으로 하고 결혼식 일정이 정확하게 결정이 되면 방문하기로 하였다. 조금 쉬어가는 타임으로 드라이플라워나 향수, 드림캐처를 구경하기도 했으며, 지나가다가 문득 시야에 들어온 신혼부부 인테리어 부스에 들어가 가구나 인테리어 소품을 구경하기도 했다. 마침 리모델링과 관련된 업무도 함께 도맡고 있었기에, 언젠가 말해두었던 거실 리모델링을 생각하며 해당 부스의 업체를 후보로 생각해두기도 했다.
그렇게 오래 돌아다녔으니 지칠 만도 했다. 박람회 내부에는 외부 음식이 반입 불가인 상태였으나, 내부의 임시 카페에서 파는 음식은 괜찮았기에 아스테르와 리오르는 소프트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카페테리아 의자에 앉아있었다. 박람회와 결혼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던 도중, 궁합이나 사주, 타로 등을 무료로 봐주는 부스가 그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평소라면 무심코 지나치거나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시선조차 주지 않을 테지만, 결혼을 앞둔 상태라 아무리 아스테르라도 호기심이 동한 모양이다.
“아스, 우리 저거 해볼래에~?”
그 생각은 리오르도 마찬가지였는지, 상념에 빠져있는 아스테르의 옆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며 운을 뗐다. 궁합이나 타로를 믿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 결과가 나쁘게 나온다면 괜히 찝찝할 것 같은 마음에 아스테르는 결정을 망설이고 있었으나, 그에게서 대답이 돌아올 때까지 리오르는 집요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 탓에 그는 진땀을 빼다가 결국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락을 했다. 부스에 가보기로 결정을 내린 그들은 손에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텁, 하고 입에 마저 밀어 넣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타로 리더는 친절하고 솔직했다. 돈을 받고 하는 일이 아니어서 그런 것인지, 제 앞에 펼쳐진 카드를 알기 쉽게 설명해주었다. 간혹 예비부부들의 앞날을 축복해주기 위해 부러 결과를 좋게 말하거나, 제대로 된 실력이 없기에 결과를 좋게만 말하여 아부를 부리는 자들도 있을 테지만 그런 낌새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간혹 결과가 좋지 않아 싸우고 가는 이들도 있으며, 실력이 없다며 저를 비난하는 이들도 있다고 하였다. 그에 이어, 여태 본 애인이나 부부들 중 가장 결과가 좋다는 말도 덧붙였다.
“궁합도 잘 맞고, 타로에서도 앞으로의 미래가 밝을 거라고 하네요. 아무래도 어려운 일들은 과거에 인연으로 맺어지기 전까지 모두 이겨냈기 때문에 두 분에게는 앞으로 행복만 가득하실 거예요.”
매일이 새로운 사랑의 시작이다. 언제나 식지 않는 사랑은 매일 새로운 불을 지피고, 그 불꽃은 지칠 줄을 모르는 듯 늘 타올랐다. 그 흔한 권태기 한 번 없이 평생을 서로 사랑하고 아껴주며 살 것이라니. 그보다 더 좋은 말이 어디에 있던가. 이는 타로 리더에게도 신기한 결과일 터다. 아스테르는 과거의 일들을 맞춘 것에 대해 신기해했고, 리오르는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 모습을 본 아스테르는 웃음을 터트렸고, 타로 리더는 그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앞으로 좋은 일만 있길 바란다며, 결혼 축하한다는 말을 전하는 그녀를 뒤로하고 그들은 부스를 나섰다. 어쨌거나 결론은 결과가 좋게 나와 두 천사 모두 기분이 좋다는 사실이다.
부스를 빠져나온 리오르는 뒤를 흘끔거리면서 보더니 제 양손을 활짝 펼치며 입을 열었다. 발뒤꿈치를 들어 아스테르에게 비밀을 속삭이듯 소곤소곤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리오르도 저거 할 수 있어.”
타로를? 리오르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아스테르가 눈만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고 있자, 보드랗고 뽀얀 손바닥에서 꽃 하나를 만들어낸 그가 말갛게 웃었다. 꽃 점! 해맑은 목소리에 아스테르의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결과가 궁금한데? 다정한 목소리에 리오르는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서는 꽃잎을 한 장, 한 장 떼며 말했다. 꽃잎 한 장에 아스는 리오르를 좋아한다, 꽃잎 두 장에 싫어한다. 바닥으로 어여쁜 색의 꽃잎이 팔랑거리며 떨어졌다.
싫어한다아……. 마지막 꽃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며, 리오르는 잔뜩 시무룩해져서는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 모습마저 아스테르는 귀엽다는 듯 바라보았지만, 웃음을 터트릴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하면 그의 기분이 좋아질까, 고민하던 아스테르는 그가 꼭 쥐고 있던 줄기를 보더니 손을 뻗어 그것을 빼내었다.
“좋아한다.”
아스테르는 줄기를 바닥에 떨어트리며 리오르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두어 번 눈을 깜빡이던 리오르는 금세 기분이 좋아졌는지 싱글벙글 웃으며 그에게 와락 안겨서는 제자리에서 콩콩 뛰며 입술에 꾸욱 도장을 찍었다. 그는 리오르가 갑자기 달려드는 탓에 살짝 휘청이며 허리를 숙였고, 기습 뽀뽀를 당하고서는 제 얼굴을 붉혔다. 한참을 제 입술을 매만지던 아스테르는 이내 리오르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결혼식 준비를 위해 웨딩 박람회를 하루 종일 돌아다닌 탓에 그들은 상당히 피로에 절어있었다. 평소라면 집에 돌아와서 아스테르가 저녁을 준비했을 테지만, 오늘만큼은 오래간만에 외식을 하고 돌아온 참이다. 거실 테이블에는 오늘 받아온 여러 팸플렛들이 늘어져있었다. 아스테르는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깜빡하면 깊게 잠들 것만 같았다. 그러지 못한 것은 작은 머리통이 제 팔을 비집고 들어온 탓이다. 아스테르가 느리게 눈을 뜨면, 여전히 체력이 팔팔한 리오르가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그럴 때면 없던 기운도 샘솟는 기분이었기에 그는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했다.
그가 거실 테이블을 본 것은 그 이후였다. 언제 내어왔는지, 쟁반 위에는 티포트와 찻잔 두 개가 있었다.―평소라면 투명한 유리잔을 내어왔을 테지만, 웨딩 박람회를 다녀와서 정식 부부가 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 때문인지 리오르는 고급스러운 찻잔과 티포트를 내어왔다. 하얀색 바탕에 노란색과 하얀색이 어우러진 꽃이 그려져있고, 섬세하고 고급스러운 문양이 규칙적으로 찻잔과 티포트에 띠를 두르고 있었다. 그것은 결혼식 분위기를 연상시키기에 적절한 디자인이었다.― 리오르는 발그레한 뺨을 아스테르의 가슴팍에 비비더니 이내 고개를 들어 작은 입술을 오물거렸다.
“여보, 차 마실래요오~?”
얼마 전, 프로포즈를 하고 나서 간지럽기 그지없는 호칭을 입에 올릴 때만 해도 부끄러워서 말을 더듬었던 그가 이제는 보다 자연스럽게 달달한 호칭을 불러준다. 완전히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은 아니겠으나, 그 나름대로 용기를 낸 셈이다. 아스테르는 사랑스러운 그 입술에 입을 맞추고 나서야 피로가 누적된 몸을 소파에서 일으켜 거실 바닥에 내려앉았다. 안 그래도 붉은 뺨을 더 발갛게 물들인 리오르는 잠시 굳어있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한 박자 늦게 소파에서 내려왔다.
쪼르르, 소리와 함께 리오르가 찻잔에 따른 차의 향이 은은하게 퍼졌다. 강하지 않지만 기분을 좋게 만드는 꽃 차는 언제 마셔도 일품이다. 특히 오늘은 하루종일 박람회를 돌아다니느라 힘들었을 아스테르를 위해 리오르가 신경 써서 피로에 좋은 홍매화차를 준비했다. 붉은 꽃잎에도 찻물은 연한 노란빛을 띄었다. 달그락. 찻잔을 들어 그 향을 음미하던 아스테르는 이내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전신의 피로가 녹는 따스함에 그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그렸다. 차를 한 모금 더 마시던 그는 찻잔을 내려놓은 이후 테이블 위에 어지럽게 흩어진 팸플릿들을 펼쳤다. 부스에서 설명을 들을 때도 읽은 것이지만, 사람을 응대하면서 듣는 것과 차후에 따로 읽는 것은 별개라, 그들은 아까 정해둔 사항들을 하나씩 짚어가면서 재차 확인을 했다. 결혼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그들의 밤도 점차 깊어졌다.
*
결혼은 새로운 시작이다. 그 출발점에 선 천사들은 왼손 약지에 낀 반지를 보며 고민에 빠졌다.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그들에게는 커플링 대신 끼고 있던 반지의 의미가 특별했다. 적어도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스테르는 리오르를 소중한 이라고 생각했을 때, 그가 가지고 있던 물건 중 가장 소중했던 은색의 실버링을 주었다. 애착인지 집착인지 모르겠으나, 그는 타인이 제 물건을 건드리는 것조차 싫어했었다. 허락을 구하고자 해도 거절하는 것이 부지기수였다. 그랬기에 아스테르가 리오르에게 제 물건을 선물로 준 것은 무척이나 놀라운 일이었다.
그에 대한 보답이라고는 뭣하나, 리오르는 제 능력을 이용하여 그에게 마거리트 꽃반지를 만들어주었다. 꽃은 시들고, 결국엔 말라 바스러져 추억으로만 남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이 결실을 맺으면서 리오르는 스러져가는 생명에 자신을 증명하는 소중한 헤일로 조각을 보태었다. 흰색의 반지에는 아스테르의 눈동자를 닮은 색으로 꽃 모양이 새겨져있었다. 마음속에 감춘 사랑도 되고, 가슴속에 숨기고 있던 비밀을 밝히기도 하며, 그것이 진실된 사랑으로 이어지는 꽃말처럼. 그들이 사랑한 시간을, 인연을 담고 있는 반지이다. 마음에 차고도 넘치는 탓에, 그들은 고민에 빠졌다. 그렇다고 출발점에 서서 변함없이 지금의 반지를 끼는 것도 망설여졌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들은 끼고 있는 반지를 합쳐서 새로운 디자인의 반지를 주문 제작하기로 했다. 가게를 몇 군데나 돌면서 예쁜 디자인의 반지를 많이 보기는 했지만, 그들에게 큰 의미를 가져다준 반지를 그대로 두기에는 아쉬운 감을 떨칠 수 없었던 탓이다. 디자인에 재주는 없었지만, 두 천사는 스케치북을 펼쳐 각자가 나름대로 생각한 도안을 그리기 시작했다. 서로의 도안을 비교하면서, 서로의 디자인을 접목시켰다. 결과적으로 만족스러운 도안에 그들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문제는 결혼반지의 수주를 어디에 맡길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아, 루. 내가 좋은 생각이 있는데.”
“응? 뭔데에~?”
“오스왈드 씨에게 맡기는 건 어때? 실력도 좋으신데다가 우리 아버지 친구분이시고. 이참에 청첩장 나오면 그분에게도 드리자.”
“리오르는 찬성!! 찬성~~!!”
레슬리 오스왈드는 아스테르의 아버지 에베르의 친우이자 어머니 이디스의 친우였다. 그는 아스테르가 제 부모의 흔적을 쫓을 때, 큰 도움을 주었다. 안타깝게도 부모님이 살아있지는 않았으나, 아스테르는 그 덕택에 제 부모님이 어떤 천사였는지 알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이후, 레슬리는 먼저 세상을 떠난 에베르를 대신하여 이디스의 행방을 찾았으나, 포로로 끌려간 그녀는 이미 죽은 이후였다. 아이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기에, 그는 아스테르가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다. 수많은 이들의 죽음에도 세상은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었고, 레슬리 역시 일거리를 찾아야 했다. 그는 보석 세공사 일을 시작했고,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지금은 중앙 거주지구 외곽에 가게를 차렸다.
평생에 단 한 번뿐일 결혼식이기에, 이왕이면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결혼반지를 맡기고 싶을 테다. 아스테르가 레슬리를 떠올린 것은 그 이유가 가장 컸으나, 부모님에 대해 알려준 그에게 감사한 마음도 있었기에 좋은 소식을 전달하는 동시에 청첩장을 드리는 것도 목적에 포함되어 있었다. 기쁜 일은 나누라 하였다. 직접 방문하는 것만큼 중요한 사안을 전달하기에 적절한 방법도 없었기에, 다소 먼 거리라고 하더라도 날이 밝는 대로 출발하기로 했다.
오랜만에 기차에 다시 올라탄 그들은 전과 다르게 들뜬 기분이 되었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그들은 아스테르의 부모님 행방을 찾는 것에 급급해서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다. 창밖에 지나가는 풍경을 보다가 점심시간이 되면, 그들은 기차 내에서 파는 도시락을 사서 함께 먹기도 하고 서로에게 먹여주기도 했다. 겨울의 추위 탓에 창문에는 서리가 꼈지만, 기차 내부는 따뜻했고 낮의 햇빛은 창문 너머로 따사로이 내려왔다. 배도 든든했던 차에 그들은 깜빡 잠이 들었으나, 다행히도 내려야 하는 기차역에 다 와간다는 안내 방송을 듣고 깨어났기에 서둘러 내리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역에서 레슬리 오스왈드의 가게까지는 그리 거리가 멀지 않았다. 처음 방문했을 때도 길이 그리 복잡하지 않았기에 길을 헤매지 않았다. 딸랑-. 몇 년 만에 들어보는 풍경 소리인지. 100년 만이던가? 새록새록 떠오르는 추억을 떠올리며 그들은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 …아스테르?”
“오랜만이에요, 오스왈드 씨.”
레슬리는 많이 놀란 모양이었는지, 늘 입에 달고 살던 ‘어서 오세요.’라는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아스테르의 이름을 담았다. 리오르의 손을 꼭 잡고 있던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그리며 주인장에게 인사를 했고, 넉살 좋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간 찾아오지 못해서 죄송하다거나, 한 번은 찾아왔어야 했는데 다음부터는 종종 들리겠다거나. 벌써 100년 전의 이야기지만, 새삼스럽게 부모님의 일에 대해 다시 감사 인사를 표하거나. 그때는 여유가 없었기에 하지 못했던 말들을 꺼내며 대화를 나누었다. 가령 그들의 결혼 소식이라거나. 아스테르가 물고 온 소식에 레슬리는 동그랗게 눈을 떴다.
“그래서 옆은 네 애인이고, 곧 결혼한다고?”
“네, 그래서 오늘은 오스왈드 씨에게 결혼반지를 맡기고 싶어서 찾아왔어요.”
레슬리는 한참 동안 리오르를 응시하더니 허, 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비를 닮았구먼, 그래.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들을 내버려 두고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그들의 주문을 수락했다. 시간은 약이 된다. 그간의 시간 동안 그도 품고 있던 죄책감을 많이 내려놓았다. 무엇보다 아스테르가 무사히 살아있고, 이제는 평생을 함께 할 배필을 찾아 행복하게 살고 있으니 말이다. 리오르가 건넨 도안을 보며 어떻게 작업을 할지 고민하던 그에게 아스테르가 조금 전의 말은 무슨 의미인지 물었다. 심각하게 스케치북을 응시하고 있던 그가 이내 별것 아니라며 웃었다.
“이디스도 네 애인과 같은 머리색이었다. 그래, 눈 색은 아스테르 너와 같다만, 금안인 것은 둘이 비슷하구나.”
그들은 그제야 그 말을 이해했다. 아스테르는 그들의 꿈에 나왔던 제 부모의 모습이 어쩌면 진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 꿈에서도 이디스는 베이지색 머리에 저와 같은 금안이지 않던가. 도안을 살펴보는 것을 마친 레슬리는 이 정도면 충분히 만들 수 있다는 답변을 내어놓았다. 그 탓에 아스테르는 상념에서 깨어나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다.
“아무리 친구 녀석 아들이라도 공짜는 없다.”
“하하, 그럴 리가요. 정당한 대가는 당연히 지불해야죠.”
너털웃음을 치던 레슬리의 어투는 영락 없이 장난이 어려있었다. 그에 익숙하게 응대한 아스테르는 리오르와 시선을 주고받더니 그들이 끼고 있던 반지를 내밀었다. 잘 부탁드립니다아아~!!! 리오르는 말갛게 웃으며 반지를 건넸고, 레슬리는 팔을 걷어붙이는 시늉을 하더니 맡겨만 달라 하였다. 반지가 완성되면 연락한다는 말에 그들은 아쉬움은 뒤로하고 다음에 방문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들의 걸음이 문득 멈춘 것은 레슬리가 아스테르를 불러 세운 탓이다.
“아스테르, 네게 줄 것이 있다.”
의문을 가득 품은 시선 둘이 제게로 향하자, 레슬리는 뒤쪽의 선반에서 앨범을 펼쳐, 고이 간직해두었던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아스테르는 그것을 받아들었다. 곧장 고개를 든 그는 놀란 표정으로 레슬리를 바라보았고,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좋아할 줄 알았다. 그렇게 말하며 등을 돌리는 그에게, 아스테르는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그 말을 몇 번이고서 하며 말이다.
돌아오는 기차에서 아스테르는 사진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 흘러 빛이 바래지고, 찢어질 것처럼 보이는 사진을 응시하던 그는 옆에서 고개를 빼꼼 내미는 리오르를 보며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리오르 말이 맞았어! 아스 어머니는 엄청 예쁘고, 아스 아버지는 엄청 멋져! 그러게, 루 말대로네. 우리가 꿈에서 본 모습이랑 똑같다. 그렇지? 아스테르는 제 엄지로 사진을 살살 쓸어보더니,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갑자기 들려오는 째깍, 째깍 소리에 리오르는 눈을 깜빡이며 연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언젠가 본 적이 있는 불투명한 회색의 오른 눈동자에는 독특한 시계 모양이 새겨져있었다. 리오르가 다시 사진을 바라보면, 이제 막 인화한 것처럼 멀쩡한 사진이 그의 손에 들려있었다.
사진 속에는 에베르와 이디스가 나란히 서있었다. 누가 봐도 행복해 보이는 그들은 두 천사가 꿈에서 본 아스테르의 부모님 모습과 똑같았다.
“꿈에서만 그런 게 아니었네~! 아스는 진짜로 아빠를 닮았구나!”
“응, 그러게.”
아스테르는 조금 전의 일을 떠올렸다. 그것밖에 남아있질 않더군. 등을 돌린 레슬리는 그렇게 말했다. 100년 전, 그날 아스테르가 왔다간 이후 짐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사진이었다. 언젠가 그들이 찾아오면 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차였다. 그렇게 한참을 돌고 돌아 겨우 부모님에 대해 알게 되었고, 이렇게 사진까지 있다. 아스테르는 그 사진을 소중하게 보관하기로 하고 품에 잘 챙겨 넣었다. 루. 그가 문득 제 연인을 불렀다.
“우리, 부모님 보러 갈까?”
*
어느덧 1월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고작 한 달 남짓 넘었을까. 본디 시간이 촉박하다 하였으나, 짧은 시간치고는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웨딩홀은 이미 예약을 잡아둔 뒤고, 청첩장도 이미 제작을 맡겨두었으며, 웨딩 촬영 일정은 3월 초로 잡아두었다. 거실 리모델링 일정은 2월이 되어서야 계약을 하기로 한 상태였다. 더구나 보름 전에는 양가 부모님의 묘에 찾아가 결혼 소식을 알리기도 하였으니 당장 급한 것은 신혼여행 계획을 세우는 일이었다. 여행지를 고르는 것은 물론이고, 일정, 호텔 예약까지 할 일이 태산이다.
거실 테이블은 한창 여행지 선정으로 엉망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얼마 전 도서관에서 빌려온 인간계 여행지 서적이 펼쳐져 있었고, 인간계의 세계 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이미 몇 군데는 빨간펜으로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고, 화살표로 이동 경로를 표시해두기도 했다. 이전에도 몇 번 인간계로 여행을 간 적은 있었으나,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 많았다. 하여, 그들은 이번 신혼여행지를 인간계로 선택했다. 최근 들어 인간 행세를 하며 인간계로 여행을 하는 것이 천마들 사이에서 유행인 모양이었다.
“아스으~ 우리 여기도 가보자!”
“그럴까? 보름 만에 다녀올 수 있을지 모르겠네.”
결혼 후에도 당분간은 도서관에서 근무를 할 생각이었기에, 그보다 휴가를 더 길게 내기는 어려웠다. 이미 겨울에 휴가를 길게 냈었던 상태였기에 보름이면 충분하다는 것이 그들의 결론이었다. 앞으로 함께 할 날이 더 많지 않던가. 그렇다면 얼마든지 여행은 갈 수 있었다. 물론 신혼여행처럼 특별한 여행과 비교할 수 있겠냐마는 그들에게는 매 순간이 특별하지 않던가.
하여 일정을 짜는 것은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머리가 아플 때면 아스테르가 구운 쿠키와 리오르가 우린 차를 마시며 여유를 즐기기도 했다. 때때로 차는 코코아가 될 때도 있었다. 몇 날 며칠을 매달리면서 구체적인 일정을 짜고, 어느 나라의 어느 도시에 얼마나 오래 머물 것인지 정해졌다. 여행 경비는 넉넉하게 있다 못해 넘칠 정도였기에, 그들은 교통이 좋고, 시설이 좋은 호텔을 찾으려 노력했다. 물론 값비싼 호텔이기에 그만한 가격은 지불해야 했으나, 어디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겠는가. 그 정도 부담할 정도는 되었기에, 그들은 무리 없이 신혼여행 일정 짜기를 완수할 수 있었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가고 나서야, 그들은 부쩍 결혼식 날짜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하룻밤이 지나면 2월에 접어들 것이고, 그들은 다시 긴 휴가를 끝을 내고 도서관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렇듯 일상은 계속해서 반복된다.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는데도, 두 천사는 이 모든 과정이 낯설기만 하다. 필시 그것은 아스테르의 프로포즈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이미 식은 찻물을 한 모금 마시던 아스테르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리오르를 바라보았다. 있지, 루. 우리 결혼하고 나면 카페 차리기로 했었잖아. 기억나? 오래전부터 줄곧 생각했고, 이미 몇 번씩이나 오가던 이야기이다. 멀게만 느껴졌던 그 순간이 이렇게 바짝 다가온 것에 대해 감회가 새로웠다. 그것은 비단 아스테르뿐만 아니라 리오르도 마찬가지일 터다. 두 천사가 만드는 소박한 카페 공간은 그들의 작은 꿈이자, 소소한 행복이다. 그들의 취향을 섞어 인테리어를 하고, 곳곳에 그들의 사랑이 묻어난 소품들이 가득 들어찰 것이다. 그런 공간을 꿈꾸고 있노라면, 무척이나 행복해서 견딜 수 없었다.
“우리 바빠지겠네에~! 아스랑 같이 카페! 생각만 해도 행복해!”
거실에는 작은 웃음소리가 간질거렸다. 밤은 깊어져가고, 저마다의 별들이 천사들의 이야기를 노래했다. 천사들은 깊은 밤도 모를 미래를 속살거리고, 거센 추위에도 웃음꽃을 피워냈다. 그러다 문득 별들이 창문 안을 들여다보면, 어느새 그들은 따뜻한 체온을 공유한 채 깊은 잠에 들었다.
사서들은 휴가를 낸 지 두 달 만에 돌아온 연인을 반겨주었다. 못 보는 사이에 얼굴이 더 좋아졌다거나, 그동안 잘 쉬고 왔느냐는 그런 질문을 던지거나, 이렇게 바쁜 시기에 휴가를 낸다며 장난 어린 목소리로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그것도 그만큼 사이가 좋았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2월은 다른 때보다 더 빠르게 흘러갔다. 업무가 바빴고, 퇴근 후에는 결혼 준비로 바빴으며, 주말에는 쌓인 피로 탓에 도통 집에서 움직이지를 않았다. 주문해둔 청첩장의 시안을 받아 보고, 일부는 수정요청을 했으며, 어떤 것이 더 좋을지 머리를 맞대고 고민도 했다. 2월 중순이 되었을 무렵에는 레슬리 오스왈드에게 연락이 왔다. 결혼반지 제작이 마무리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주말에 시간을 내어 기차를 타고 다시 그의 가게로 갔을 때, 두 천사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들이 고민 끝에 결정한 도안이었으나, 그 결과물은 상상을 초월했던 탓이다. 레슬리는 반지를 어여쁜 상자에 넣고 나서야 건네주었다. 그들은 조만간 청첩장을 보낼 것이라는 말과 함께 짧은 감사 인사를 전하고 걸음을 옮겼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설렘이 가라앉지 않은 예비 신혼부부는 말수가 적어졌다. 식사를 준비하며 손만 부딪혀도 화들짝 놀라며 볼을 붉히기 일쑤였고, 서로를 끌어안고 잠을 잘 때도 설레서 잠을 제대로 청하지도 못했다. 업무를 볼 때도 가끔 멍해지기도 해서, 동료 사서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이런 일의 반복은 상당히 곤란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아스테르는 정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맡은 일을 더 충실했다. 그러다 금지된 서고에서 일이 터졌을 때는, 그것을 수습하려고 얼마나 바쁘게 뛰어다녔던지. 어느 정도 일이 해결되어 갈 즈음에는 동료 사서들에게 결혼 소식을 전할 정도로 여유가 생기기는 했지만 말이다.
“3월이라, 얼마 안 남았네. 결혼 축하해~.”
“그렇게 들으니까 좀 부끄럽네. 고마워.”
미리 축하 인사를 던지는 동료들은 축의금을 든든하게 넣어가야 하는 것 아니냐며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하기도 했고, 두 사람을 놀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기는 했으나, 심장 한구석은 간질거리는 것이 부끄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제 와 새삼스럽지만 길다면 길게 느껴질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흘렀고, 어느덧 3월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사실에 아스테르는 제 볼을 긁적거렸다. 다시 봄이 온다. 오랜 겨울 끝에 돌아온 봄 중에, 가장 화창하고 맑은 날이 올 것이다.
웃음이 나온다. 과거의 아스테르라면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을 일이다. 추위 속에 태어나, 세상의 온기라고는 느껴보지 못한 그가 못다 피운 꽃봉오리를 겨우 피워내기까지 얼마나 오래 걸렸던가. 언제 바스러질지 모를 행복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아주 처음에는, 그러리라 생각도 했으나 시간이 흐르고, 추억이 쌓였으며, 마음은 깊어져갔다. 그 흐름 속에 내맡긴 약속이 하나씩 실현될 때마다 믿음은 커져갔고, 그는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았다. 이 행복은 영원과 같은 것이므로, 더는 아파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엄~ 우리 신혼여행 갔다 오면, 거실이 이렇게 되는 거야아아~???”
그가 상념에서 빠져나온 것은 리오르의 물음 탓이다. 업체에서 보내준 파일을 살펴보며 달라질 거실의 모습을 상상해봤는지, 리오르는 신기하다는 듯 눈을 반짝거렸다. 이번 리모델링 공사를 진행하면 거실 바닥 아래에 그들이 들어가서 누울 정도의 공간이 생길 것이다. 그 작은 공간에는 마룻바닥이 아닌 푹신한 쿠션으로 바닥을 만들 예정이었다. 물론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그들이 그 안에 쿠션을 두고 가끔은 이불을 넣어 그곳에 누워 쉬거나 잠에 들기도 하겠지만. 추운 겨울에는 새로 생기는 공간 바닥만 따뜻하게 난방이 되게 만들 것이고, 리모컨 버튼 하나면 움푹 파인 바닥이 사라지고, 그 위의 테이블도 다시 원상복귀가 된다.
건축이나 리모델링 측면에서 전문가가 아닌데도 시공이 복잡하고 오래 걸릴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하여 신혼여행을 가는 동안 리모델링을 맡길 생각이었다. 물론 보름 정도밖에 되지 않는 시간이기에 부족할 것이라 생각했으나, 업체에서는 상당히 긍정적인 답변을 내려주었다. 뛰어난 기술 덕분에 보름이면 충분하다고 하였기에 우선적으로 시공 후의 예상 모습을 파일로 받은 것이다. 마지막까지 꼼꼼하게 살피던 아스테르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는 고개를 기울여 리오르를 바라보았다.
“응, 루는 마음에 들어?”
“엄―청 마음에 들어!!!”
쿡쿡 소리 내어 웃던 아스테르는 곧 제 휴대폰을 들어 메시지를 보냈다. 보내주신 파일에는 이상이 없으며, 이대로 계획을 진행해달라는 말과 동시에 리모델링 일정은 처음 문의한 대로 신혼여행 시기로 부탁한다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정확한 날짜까지 적어두었다. 테이블 위에 휴대폰을 내려둔 아스테르는 소파에 기대어 고개를 뒤로 젖혔다. 피로가 그의 눈꺼풀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을 즈음, 리오르가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아스테르는 반쯤 감았던 눈을 떠서는 고개를 바로 하여 리오르를 바라보았다. 그의 두 뺨은 발갛게 상기되었고, 몸은 살짝 배배 꼬는 듯했다.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영문을 모르는 아스테르는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아스으…. 우리, 곧 웨딩 촬영하잖아, 그치이~?”
…아. 그래서였구나. 시선을 맞추었다가 화들짝 놀라서는 다시 돌려버리고, 부끄럽다는 듯이 웃고 있던 이유는. 아스테르는 그 모든 행동의 이유를 이해하고 나서부터 부끄럽다는 듯 웃어버렸다. 나흘 뒷면 벌써 스튜디오에 가서 웨딩 촬영을 하게 될 것이다. 결혼식 당일에 입는 웨딩 정장을 입지는 않지만, 어디까지나 정식적인 촬영이기에 화장도 하고 다른 웨딩 정장이나 사복도 여럿 환복을 할 예정이었다. 긴장돼? 그렇게 묻는 목소리가 달다. 리오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재빠르게 아스테르의 품에 폭삭 안겼다. 간지럽다는 듯 키득거리던 그는 보드라운 연인의 머리 위에 입을 맞추더니 다시 속삭였다. 사실은 나도 그래. 제 품에 꼭 들어오는 리오르를 더 부드럽게 안아주던 그는 콩콩 뛰는 작은 심장소리와 고요한 호흡, 그리고 따스한 온기에 낮은 웃음을 흘렸다. 그럼에도 그 모든 것을 떨쳐버릴 수 있는 것은 사랑스러운 연인 탓이라.
설렘과 긴장으로 보낸 나흘은 그야말로 빛과도 같았다. 시간이 어찌도 그리 빨리 가는지. 찰칵. 카메라 셔터음이 들릴 때마다 사진사는 오케이 사인을 내렸다. 아무래도 웨딩 촬영이 중요한 만큼 리오르는 긴장을 한 모양이었지만, 그를 잘 달래는 아스테르 덕택에 다시 찍거나 하는 불상사는 없었다. 반대로 아스테르는 긴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긴장한 연인―아니, 이제는 예비 배우자라고 해야 할까. 호칭이야 어떻든 간에 리오르를 잘 이끄는 것에 집중해서인지, 그는 긴장한 기색 하나 없었다. 네, 한 컷 더 갈게요. 조금 더 붙고, 더 활짝 웃어요. 사진사 역시 카메라 렌즈에서 시선 한 번 떼지 않고 능숙하게 프레임에 두 천사를 잡았다. 워낙 미모가 출중하니 담을 때마다 화보나 마찬가지였다. 때때로 움직이는 것에 리오르가 삐거덕거리기라도 하면, 아스테르가 그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서는 자연스레 리드를 했다.
촬영은 몇 번에 걸쳐 진행되었다. 아무래도 환복을 하는 시간이 있다 보니, 그만큼 촬영이 지체되기도 했고, 여러 옷을 입으면서 그중에 건질 사진을 고르는 작업도 무척이나 중요했기에 중간에 쉬는 시간도 가질 정도였다. 배우나 모델도 아니었기에 이 정도로 할 필요는 없었으나, 사진사의 프로 정신과 그들의 웨딩 촬영이라는 상황이 겹치는 바람에 그들은 다소 피곤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 상황에 대해 불만이라 묻느냐면 그것은 아니었다. 조금 힘이 들기는 했으나, 평소에 웨딩 정장을 누가 입겠는가. 멋지고 예쁜 예복을 입은 모습을 보는 것은 물론이요, 그것을 추억으로 담아내는 과정이 아니던가. 물론 리오르는 갑갑한 셔츠류는 피해야 했기에, 웨딩 정장을 고르는 기준이 까다롭기는 했지만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었다.
스튜디오에서 반나절을 보내고 나서야 그들은 사복으로 갈아입었다. 사진사는 배경을 바꾸는 것이 어떠느냐라고 제안했지만, 두 천사는 기존의 배경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인지, 가정집과 같은 몇 가지 소품만 추가하는 것을 제외하고 전체적인 스튜디오 배경은 바꾸지 않는 방향으로 촬영을 진행하기로 했다. 결혼식에 어울리는 하얀색 배경에, 나무로 만들어진 원탁 테이블에 흰 칠을 해두었다. 그 위에는 꽃이 담긴 투명한 유리병이 있었다. 여태 고작 그 배경과 부케 등의 소품으로만 촬영을 했기에 자칫 단조로워 보일 수도 있었겠으나, 그것은 그들이 입은 웨딩 정장이 화려한 탓이다. 아까와 다르게 깔끔하고 비교적 덜 화려한 사복을 입었기에 이번에는 신혼집에 있을 법한 가구를 소품으로 들였다.
“이러니까 진짜 결혼한 것 같다, 그치이~?”
리오르는 신이 났는지, 꺄르르 웃으며 말했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였다. 열어둔 창문 사이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고, 불투명한 하얀 커튼은 조금씩 흩날리고 있었다. 테마 컬러는 하얀색인지, 깔끔한 하얀색의 원목 가구들을 들여놓았다. 아직은 아니지만 이제 곧 할 거잖아, 그치? 작게 소곤거린 말에, 리오르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둘은 이마를 맞대며 장난꾸러기처럼 웃고 있었다. 찰칵. 셔터음이 들린 것은 그때였다. 사진사가 웃으며 말했다. 아주 좋아요. 너무 예쁜데요? 자연스러운 것이 제일이라 하던가. 오래 지속된 촬영으로 이제는 긴장은 완전히 풀렸는지, 그들은 모든 것을 즐겼다. 프레임에는 그들의 행복이 고스란히 담겼고, 그렇게 찍힌 사진들은 매우 다양했다. 그들이 이마를 맞대고 웃거나, 코를 비빈 것도 있었고, 이마나 볼, 혹은 입술에 입을 맞추고 있기도 했다. 부케를 뒤로 숨긴 채 허리를 숙이는 아스테르에게 리오르가 발꿈치를 들어 뺨에 입을 맞춰주기도 했고, 아스테르가 무릎을 꿇어서 부케를 바치는 장면도 있었다.
그 이외에도 무수히 많은 사진들이 가득했다. 어느 하나 버릴 것이 없어, 반복돼서 찍힌 사진들 중에서 제일 예쁜 것들을 선정했고, 사진사는 그것을 보정하여 차후에 사진 파일과 인화한 것을 모두 주겠다고 하였다. 보정된 사진 중 일부는 벽에 프린팅 하는 것이 요즘 유행이라고 덧붙이기도 했으나, 지금은 시일이 촉박하니 신혼여행 이후에 프린팅은 별도로 문의드리겠다는 말을 남겼다. 촬영이 끝나고서, 녹초가 된 그들은 조금 더 빨리 하루를 마무리했다. 3월, 시작의 봄이 다가오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
“…루, 자?”
식을 올리는 아침이 밝아오면, 분명 정신없이 바쁠 것이 분명하다. 까먹는 것 하나 없이 준비를 마치려면 넉넉하게 5시에는 일어나야 한다고 이야기가 나왔기에 그들은 일찍 잠에 들기로 했다. 하여 자리에 누운 시간이 9시다. 평소라면 자정이 되어서야 자리를 정리하고 누워 잠에 드는 그들이었기에 당연히 잠이 올 리가 없었다. 시간이 이른 것뿐이겠는가. 당장에 내일이 결혼식이라는데 설렘과 긴장이 섞여있었기에 잠에 들지 못하지 않겠는가. 아스테르는 가만히 리오르를 안고 있다가, 느리게 눈을 뜨며 그를 불렀다. 응?? 깨어있다는 답 대신 의문이 담긴 목소리가 울리더니, 곧 그가 눈을 떴다. 그는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10초 정도 고민하더니 답했다.
“으으음…. 리오르 안 자~. 아스는 자??”
“푸흐―. 나도 안 자. 잠이 안 오네.”
아스테르가 자지 않는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리오르는 질문을 던졌다. 그가 김빠진 웃음소리를 낸 것은 전부 그 탓이라. 무심결에 툭, 던진 말에 리오르는 헛, 하고 숨을 삼켰다. 잠 못 자면… 내일 지각하는 거 아니야아…? 우리 내일 결혼하는데…! 지각하면 안 돼…! 같이 코오 하자~. 우다다 말을 쏟아내는 것이 많이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 리오르는 아스테르를 안고 있던 손을 빼서는 그의 눈 위에 손을 올리고서 눈을 감겨주었다. 그 행동에 다시금 웃음을 흘리던 그는 리오르를 부르더니 곧 제 손을 뻗어 리오르의 손을 잡고 내렸다. 그리고 이마에 한 번, 입술에 한 번, 달콤한 입맞춤을 남기고서야 그 손을 놓아주고 연인을 품에 안았다. 이제는 정말로 자야 할 시간이었다.
“굿나잇 키스야. 잘 자―.”
그에 대한 답례처럼 리오르 역시 아스테르의 이마와 입술에 입을 맞춰주고는 든든한 품에 파고들었다. 서로를 지탱해주는 그 온기에, 아주 다행히도 그들은 금세 잠들었다.
눈을 감았다 뜨면 언젠가 보았던 광경이 펼쳐져 있다. 기시감 같은 것이 아니었다. 아스테르가 뒤를 돌아보면 그곳에는 제 부모님과 리오르의 양어머니인 실리아, 그리고 리오르가 있다. 아스테르는 놀란 듯이 눈을 깜빡거렸고, 그러던 중 시선이 마주친 리오르도 놀란 것은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그들은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기 위해 서로를, 그리고 부모님을 번갈아보았다. 필시 이것은 꿈일 터지만, 두 사람이 공유하는 것이다. 처음 그들이 나타난 꿈에는 약혼식을 새로이 올렸고, 이번에는 결혼식 전날 밤에 나타난 것이다.
“아스테르―. 사랑하는 내 아들, 이제 결혼하는구나. 축하해.”
“난 네가 자랑스럽다.”
그 누구도 말을 하지 않는 적막한 분위기를 깬 것은 이디스였다. 그녀가 입을 열자 에베르도 한 마디를 덧붙였고, 리오르는 그제야 이 상황이 실감이 났는지 기쁜 듯 실리아를 끌어안고 행복하게 웃으며 방방 뛰었다. 엄마~, 리오르 내일 결혼한다아~? 별장 앞의 작은 묘 앞에서 얘기를 하기는 했으나, 얼굴을 마주하고 얘기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상상이나 했겠는가. 실리아가 아이를 키울 때는 무척이나 여리고 상처가 많은 작은 아이였다. 그랬던 아이가 벌써 이만큼이나 커서 결혼을 한다고 하는 것이다. 코끝이 찡해진 그녀는 큼큼, 하며 목을 가다듬더니 리오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녀는 곧 시선을 돌려 에베르와 이디스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알고 왔어. 어서 가서 인사드려야지, 리오르? 그녀의 말에 리오르는 핫, 하고 숨을 삼키더니 그녀의 손을 잡고 토도도, 아스테르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는 이내 새로이 가족이 될 연인의 부모님에게 허리를 숙여 배꼽 인사를 하고는 말갛게 웃었다.
“안녕하세요오~. 아스의 신부님이 되고 싶은~ 리오르예요~~! 리오르 예쁘게 봐주세요오~! 꼭 아스랑 행복하게 살 거예요! 카페도 차리고, 여행도 많이 갈 거에요!!!”
그렇게 자랑하는 모습이 귀여워 보이는 것은 비단 아스테르만이 아니었다. 그의 부모님 역시 두 천사를 흐뭇하게 바라보셨고, 특히 이디스는 리오르를 퍽 마음에 들어 한 모양이었다.
“너희들의 앞길에 아주 행복한 있기를 바란단다. 아스테르, 리오르. 우리는 언제나 너희가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단다. 언제나 함께하고 있어. 그러니 앞으로도 예쁘게 살려무나. 리오르, 아스테르를 잘 부탁해.”
“네!!! 걱정 마세요! 리오르가 아스에게 엄~청 잘 할 거예요~!!!”
축복의 말은 익히 들어왔다. 동료 사서들이나 부모님의 친구나, 결혼식을 준비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말을 잔뜩 들었다. 하나, 그것은 부모님에 비할 바가 될 수 있던가. 이제를 세상을 떠나 곁에 없는 그들이 꿈을 통해서라도 나타나주었다. 그 사실이 기뻐 그들은 제 부모님을 꼭 안아주었다. 이제는 모두 한 가족이 아니던가.
제 아이들을 향해 축복의 말을 건네주고 나서는 부모님들의 시간이었다. 잘 부탁한다는 인사의 일종이었다. 그들이 살아있었더라면 실제로 그러한 모습일 테지. 그 훈훈한 과정을 지켜보던 아스테르와 리오르는 맞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던 중, 그들의 시선이 새로 탄생할 부부에게로 향했다. 마침 인사가 끝난 참이었다.
“우리가 결혼식에 함께 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 선물을 해주려고 왔어.”
실리아의 말에, 주변 풍경이 변했다.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것은 지금 딛고 있는 이곳이 꿈이기에 그런 것일 테다. 화사한 빛에 흐릿하게 보이기는 했으나, 그들의 복장이 바뀐 것은 분명했다. 아스테르는 흰색 와이셔츠에 베이지색 조끼, 그리고 그보다는 더 옅은 베이지색의 정장 재킷과 바지, 목에는 평소와는 다르게 그의 머리색을 똑닮은 나비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옷이 바뀔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는지, 그가 잠시 제 복장―그것도 결혼식 때 입기로 한 복장을 살펴보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개를 돌리니 마찬가지로 리오르도 옷이 바뀌었다. 제일 윗단추는 푼 베이지색 차이나 카라 셔츠에 하늘거리는 케이브, 그리고 머리에는 흰색의 기다란 베일을 쓰고 있었다. 베일의 앞쪽은 턱 끝까지 내려왔고, 뒤쪽은 마치 웨딩드레스처럼 길게 드리워질 정도의 길이였다. 손에는 새하얀 부케가 들려져 있었다.
혹자는 한낱 꿈에 불과하다고 말할 것이다. 제대로 된 식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하나, 그 꿈은 그들이 현실에서는 이루지 못할 소망과 바람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오랜 시간 부모님과 함께 하지 못하고, 그들에 대한 기억조차 하지 못한 아스테르에게도 그들의 손을 잡고 새하얀 길을 걸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 길의 끝에 섰을 때, 그들은 손을 뻗어 훌쩍 자라버린 제 아들에게 축복을 선사했다. 찰랑. 맑은 소리가 들리며 아스테르의 위로 무언가가 드리워졌다. 놀란 그가 손을 뻗으면 축복 아래에 서있을 두 천사의 눈 색을 닮은 보석이 달린 헤일로가 있었다. 원의 형태의 헤일로는 마치 달처럼 보이게 작은 원이 하나 더 있었으며, 눈부신 빛을 받으니 더욱 밝게 빛났다.
“아스테르, 네 헤일로는 너를 지키고 사라졌다. 내가 약간의 힘을 실어넣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우리가 너를 지켜줄 차례야.”
에베르는 말을 아꼈다. 하나 꿈이질 않던가. 말하지 않아도 그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아스테르는 알 수 있었다. 부모도 없고, 아무런 보호도 받을 수 없는 그가 5살까지 무사히 살 수 있었던 이유와 제게 헤일로가 없었던 이유. 에베르의 능력인 ‘보호’가 그의 헤일로에 걸려있었고, 5년이나 지난 시점에서야 그것이 바스러져, 사라졌다는 것. 아스테르는 고개를 찬찬히 저었다. 그때도, 지금도 계속 지켜지기만 하고 있질 않던가.
“결국은 아버지가 지켜준 거잖아요. 저 이제는 제 몸 정도는 지킬 수 있어요. 그러니, 앞으로도 저희 꿈에 나와주세요.”
지켜봐왔기에 그의 성장은 그들 부모에게 크게 와닿았을 것이다. 에베르와 이디스는 부드러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들이 한 발자국 물러나자, 저만치에서 리오르가 실리아의 손을 잡고 걸어오고 있었다. 그 광경이 너무도 아름다워,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아스테르는 곧 눈을 부드러이 휘어웃었다.
한 걸음, 두 걸음. 몇 번의 걸음 끝에 두 사람이 아스테르의 앞에 섰을 때, 실리아는 제 아들의 손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리오르의 손을 건네받은 그는 몇 번이고 연습하고 상상했던 말을 꺼냈다.
“제가 꼭 루를 행복하게 해줄게요. 지금보다 더 잘 살겠습니다.”
“아스테르, 우리 아들 잘 부탁해. 우리 사위가 아주 훤칠하네.”
배시시 웃던 리오르가 손을 뻗어 그의 헤일로를 잡아보려 했지만, 손에 닿지 않아 눈을 깜빡거리고 있을 즈음 실리아가 그를 바라보았다. 리오르, 너에게도 줄 선물이 있어. 그녀는 손을 뻗어 리오르의 손목과 목에 대었다. 맑은 빛이 일렁이더니 리오르의 옷이 평범한 베이지색의 와이셔츠로 바뀌고, 아스테르의 머리색을 품은 기다란 리본이 매여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묻는 표정으로 리오르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으면, 그녀는 부드러운 미소로 화답하며 입을 연다.
“아픈 건 엄마가 모두 가져갈 거야, 리오르.”
흉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실리아가 가져간 것은 리오르의 트라우마, 과거의 악령에 얽매여 살아왔던 지금까지의 아픔을 모조리 가져간 것이다. 리오르는 울컥한 마음에 그녀에게 안겼고, 아직도 여린 제 아들의 등을 그녀는 가만히 토닥여줄 뿐이었다.
이후 식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약혼식을 올릴 때처럼 그들은 평생을 함께 하겠노라, 다짐을 하고 가족이 다 같이 있는 사진도 몇 장이나 찍었다. 그 모든 기억은 아스테르의 새로운 시간 속에, 맑게 울리는 소리에 고스란히 담겼다.
***
알람이 채 울리기도 전에 눈이 떠진 것은 분명 꿈 때문일 터다. 1분도 채 되지 않아서 울리는 소리에 나는 느리게 손을 움직여 알람을 끄고는 멍한 표정을 지은 채 여전히 누워있는 루를 바라보았다. 꿈속에서 봤던 장면들이 너무도 생생하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이런 꿈을 꿨던 그날도 루는 나와 같은 꿈을 꿨다며 신기하다 말했었지. 5시 2분. 휴대폰 액정에 표시된 시간을 보고 느리게 몸을 일으킨 나는 고개를 돌려 루를 바라보았다. 조심스레 질문을 던진 것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였다.
“혹시… 루도 나랑 같은 꿈 꿨어?”
“결혼식…! 엄마! 아스 부모님!”
내 예상이 맞는 모양인지, 루는 벌떡 일어나서는 이불을 붙잡고 외쳤다. 평소라면 웃음을 터트렸을지도 모르지만, 결혼식 전날 밤에 꾼 꿈이다. 정말 결혼식을 보러 와주셨구나, 싶은 마음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나랑 똑같은 꿈 꿨구나…. 그리 말하는 순간에 짤랑, 소리가 울린 탓에 눈을 깜빡거렸다. 조금 전까지는 몰랐지만, 어느새 생긴 헤일로가 눈에 들어왔다. 꿈에서도 루가 내 헤일로를 보며 신기해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아직 봐도 신기한지 눈이 동그래져서는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예쁘다…! 반짝반짝해…!!!!”
아직은 이른 새벽에 가까웠기에 빛이 들어오지 않아, 꿈에서처럼 빛나지는 않았지만 굿모닝 키스를 하고, 씻고 준비를 하며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악몽을 몰아내고 좋은 꿈을 꾸게 하는 것이 드림캐처라면, 내 헤일로는 썬캐쳐에 가까웠다. 빛이 들어오면 반짝거리며 빛이 났고 바람이 불면 그 흐름에 따라 움직이며 차랑차랑 소리를 냈으니 말이다.
루는 내게 헤일로가 생긴 것이 무척이나 좋았는지, 머리 위에 헤일로를 띄우고는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리오르도 천사님~, 아스도 천사님~, 하며 말이다. 말끔하게 씻고 나와서 이른 아침을 먹으며 루는 마치 소풍을 가기로 한 날처럼 말했다.
“리오르 오늘 결혼해~!”
“그러게, 우리 결혼하네.”
작년 12월 14일, 프로포즈를 하고 여태까지 결혼 준비를 하면서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나 그것을 입에 담아내는 것은 또 기분이 달랐다. 새삼스러운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걸까. 부끄러움에 볼을 긁적이고 있을 때 루는 결혼 후에 떠날 신혼여행이 기대된 모양인지, 신난다고 솔직하게 제 감정을 얘기하고서 볼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그렇다고 나 역시 제대로 루를 보고 있었다는 소리는 아니다. 기분이 이상해진 것은 비단 루만은 아니니까.
결혼식장에 들어가서부터는 도통 루를 볼 수 없었다. 식 전까지는 각자가 대기실에서 기다려야 한다는 건 당연한 절차이기는 했으나 궁금할 수는 있잖아? 나는 애써 자기 합리화를 시도했다. 메이크업을 받으면서는 루도 받고 있겠지, 라는 생각도 들었고, 머리를 세팅하면서는 루가 어떻게 볼지 감상이 궁금했다. 웨딩 정장을 입으면서는 이제야 결혼식을 올린다는 사실이 실감이 났고, 루의 어머니, 그러니까… 이제는 장모님이라고 해야 할까? 어쨌든, 그 선물 덕택에 식을 올릴 때 입을 와이셔츠를 바꿀 수 있었다. 맞춤 정장을 준비하면서, 웨딩홀 측에서 베이지색 블라우스에 갈색 리본 끈을 추천해준 탓에 혹시나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준비는 하고 있었던 것이 다행이었지, 아마?
결혼식이기에 루 생각을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러다가는 계속 보고 싶어서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애써 그 생각을 밀어내려고도 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무참히 실패로 돌아갔다. 물론 동료 사서들은 좋은 의도로 나와 루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해주었지만, 그럴수록 더 보고 싶은 마음은 커져만 갔다. 물밀듯이 사람들이 찾아와서 축하의 말을 건네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사진도 찍느라 애써 아닌 척했지만.
“아주 보고 싶어 죽겠다는 표정이네.”
“리시오?”
다른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즈음 들려온 반가운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거기에는 내 오랜 친구 리시오가 있었다. 아, 그래. 그 뒤로는 간간이 연락만 하며 지내기는 했었지. 청첩장을 보냈을 때 결혼식에 참석하겠다고는 했지만, 이렇게 오랜만에 얼굴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더구나 오늘의 리시오는 사회도 맡아줬으니, 중요한 역할을 맡기도 했고. 그때는 농담 삼아서 얘기했던 것 같은데 상황이 이렇게 되니 기분이 조금 이상하기도 했다.
대기실 입구 근처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그가 가까이 다가왔다. 결혼 축하한다, 아스테르. 그 말에 나도 모르게 픽, 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깨를 으쓱이던 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그였지만, 그래도 기뻐한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마주 잡은 손이 제법 단단하다. 가볍게 인사를 마치고는 그간의 근황을 물으며 대화를 나누기도 했고.
“바쁠 텐데 시간 내서 와줘서 고마워, 리시오.”
“친구 결혼식인데 와야지. 사회 맡아준다고 했었고.”
“그걸 기억하고 있었어?”
“그래도 제법 진지했는데.”
그는 이미 루 쪽은 다녀온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내가 보고 싶다고 아우성을 치더라는 얘기를 해주기도 했다. 그는 나를 한 번 슥 보더니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루가 그렇게 보고 싶어 할 만한 이유를 알 것 같다고 덧붙였고.
리시오가 머무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아무래도 사회 준비를 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객 한 명이 물러나고 나자, 대기실로 반가운 얼굴이 들어왔다. 이번에는 오스왈드 씨였다.
“신랑 인물이 훤하구먼. 기분이 어떠냐, 아스테르.”
“오스왈드 씨, 오셨네요.”
오스왈드 씨는 호탕하게 웃으며 당연히 와야 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문득 어젯밤 꿈에 나왔던 부모님이 떠올라서 울컥하기는 했지만. 아버지 대신 참석한 기분이라고 할까. 사진을 찍고, 축하의 인사를 듣고 얘기를 하던 중, 그에게 사실대로 얘기했다. 실은 어젯밤 부모님이 꿈에 나타났다고. 새로운 식구가 될 이들이 모여 사진을 찍고, 꿈에서 결혼식을 치렀다고. 그는 내 말을 끝까지 묵묵하게 듣고 있다가 투박하지만 섬세한 손으로 툭툭, 등을 두 번 두드려주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평소의 호탕한 성격과 다르게 슬픔을 머금은 목소리처럼 들렸다. 아마도, 내가 느낀 것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 이제는 곁에 없는 사람에 대한 슬픔이자, 이렇게 찾아와준 것에 대한 감사한 마음 말이다.
“분명 그놈도 결혼식을 보고 싶었을 거다. 그래서 나타난 거야. 그러니 기죽지 말고, 어깨 당당하게 펴고 걸어라. 알겠냐?”
“푸핫! 꼭 그렇게 할게요. 감사합니다, 오스왈드 씨.”
그 뒤로도 많은 사람이 오갔고, 결혼식 시간은 점차 다가왔다. 참 기분이 미묘했다. 루를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시간이 얼른 흘렀으면 좋겠다는 마음과 시간이 지날수록 긴장되는 탓에 상충되는 마음이 일렁거렸다. 대기실을 가득 채우던 사람들도 어느새 빠져나갔고, 웨딩홀의 직원의 안내에 따라 나는 굳게 지키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멀리에서 사회를 보는 리시오가 보였고, 내게 집중되는 여러 시선들이 보였다.
신랑 입장을 외치는 목소리가 울렸다. 그 목소리가 어떻게 들렸는지도 사실은 잘 모르겠다. 긴장을 많이 한 탓인가? 그렇지만 그런 것치고는 제법 잘 걷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꿈속에서 새하얀 천 위를 걸어봐서 그런 걸까. 아니더라도 그런 착각이 들었다. 제대로 들리지는 않았지만, 분명 결혼 행진곡이 울렸던 것 같다. 그렇게 주례의 앞에 멈춰 서서 신부 입장이라는 소리가 들리고 서야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모든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느린 전주의 결혼 행진곡과 작게 환호하는 사람들의 목소리. 커다란 문이 열리는 소리와 바닥을 쓰는 긴 베일의 소리까지. 문을 열어준 웨딩홀 직원들은 양옆으로 자리를 비켜주었고, 동료 사서 친구들이 루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래, 첫 감상을 먼저 얘기하자면 놀랄 수밖에 없었다. 꿈속에서 흐릿하게 보였던 모든 모습이 이제는 선명하게 보였다. 목에는 하얀색 레이스의 웨딩 초커가 있었고, 양 손목에는 내가 프로포즈를 할 때 선물해준 천 팔찌를 하고 있었다. 베이지보다는 연한 갈색에 가까운 셔츠에 내 머리색을 닮은 리본 끈은 매우 잘 어울렸다. 다 장모님의 소중한 선물 덕분이다. 케이프가 잘 어울리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카라 부분도, 천의 끝자락도 날개인 것처럼 마무리되어 있었고, 그 색이 새하얀 것이 오늘 같은 날에 참 잘 어울렸다. 하얀색의 베일은 턱 끝까지 내려와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 너머의 루도 분명 아름다울 것이라 생각했다. 당연하잖아, 내 신부고, 내 남은 생을 함께 할 배우자인데.
베일에 달아둔 하얀색과 분홍색의 꽃은 루의 머리 위에 띄운 헤일로의 꽃이 핀 것만 같았다. 부케의 하얀 라넌큘러스는 무척이나 어여뻐 보였다. 아, 루가 꽃이랑 잘 어울려서 그런가. 이러니 내가 팔불출이라는 소리를 듣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루가 내 앞까지 다가왔을 때,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실제로 내가 시간을 멈췄다는 것은 아니고. 동료 사서들이 건네주는 손을 붙잡는 것은 기분이 또 달랐다. 나는 베일 너머의 내 사랑하는 천사를 향해 웃어주었다. 주례사를 위해 앞으로 몸을 틀었으나, 주례사는 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의례적인 축사라 하면 알까. 참석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올리고, 아스테르 하르모니아와 리오르 하르모니아가 기나긴 연의 끝에 드디어 아름다운 사랑의 결실을 맺는다는, 그런 이야기였다. 기나긴 주례사가 끝난 뒤에야 혼인 서약을 올릴 차례가 돌아왔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모든 것을 함께 나누며, 괴로울 때엔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 곁에 있어주고 하늘의 부름으로 별이 되어 떨어질 때까지 서로를 아껴주고 평생의 지지 않을 꽃을 피워낼 것을 맹세합니까?”
앞으로, 평생을 함께 하면서 어려운 일이 새로이 닥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겁쟁이 별을 향해 손을 내밀어 준 첫 사람이다. 그런 루가 힘겨워 할 때, 나는 얼마든지 그 버팀목이 되어줄 것이고 항상 옆에 있을 것이다. 이제 와 못할 것이 무어 있을까. 이미 오래전부터 그러리라 다짐해온 것이었기에 나는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
“설령 폭풍우가 몰아친다 하여도 항상 배우자 리오르 하르모니아의 곁을 지킬 것이며, 어떤 어려움에도 끝내 아름다운 꽃을 피우며 하늘의 별이 되어 떨어질 때까지 함께 하고 아껴줄 것을 맹세합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루의 대답을 듣고, 그 말이 너무도 기뻐서. 그리고 이어진 주례의 말이 너무 기뻐서.
“이로써 두 천사는 하늘의 축복 아래에 부부가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늘의 축복 아래에서 부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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