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을 볼 수 있다고?”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난 귀신을 볼 수 있어요.’라고 말하면 몇 명의 사람이나 믿어줄까. 여름이면 꼭 비가 오는 으슬으슬한 밤, 삼삼오오 모여 괴담 이야기를 꺼내며 ‘귀신이 거기에 있어!’라고 얘기를 하는 이는 꽤 여럿이었으나 실제로 귀신을 보는 것은 아닌 경우가 허다하다.―그러니 그런 농담을 하는 것이겠지만.― 예외적으로 때때로 TV 프로그램에 나오는 무당이나 특수한 장소에서 귀신을 봤다는 일반인들의 목격담이 들려오고는 했으나, 그들도 늘 귀신을 보며 사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런 부류의 이야기를 시시콜콜한 농담 축에도 끼워주지 않고 전혀 믿지 않는 사람의 경우라면, 누구나 귀신을 볼 수 있다는 사람의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그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 아스테르 본인이었다. 그는 미간을 꾹 눌렀다. 갑갑했는지 꽉 졸라맸던 넥타이를 살짝 풀고서 비서에게 차를 내어오라고 부탁하고는, 제 앞에 서있는 청년을 소파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그래요, 그건 둘째 치고. 당신이 절 찾아온 이유가 뭔가요?”

제 이야기를 들어줄 것이라고 생각지도 못했는지, 청년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그 유명한 하르모니아의 사장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이 갑작스러운 상황을 이해하려면 며칠 전의 사건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


그날은 유난히 비가 많이 오는 날이었다. 희끄무레한 가로등 불빛은 어둠이 덜컥 내려앉은 도로를 어슴푸레 비추고 있었다. 휑한 도로 위는 값비싼 자동차 한 대를 제외하고는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아스테르가 투자 건으로 방문해야 하는 곳에서 일을 마치고 되돌아오는 길에 길거리에서 누군가가 우비를 쓴 채 손을 흔들어댔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우산도 없이 거센 빗속에서 뭘 하는 거지?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비서실장을 불렀다.

“실장님, 차 세워주세요.”

네. 그는 짧게 대답하며 차를 세웠다. 차는 딱 처량하게 비를 맞고 있는 인영 앞에 섰다. 그는 기쁜 듯 차 옆으로 다가왔다. 빗방울로 얼룩진 창가에 그림자가 드리우자 아스테르는 그가 쉽게 탈 수 있게 옆으로 자리를 옮겼고, 달칵이는 소리와 함께 차 문이 열리며 인영이 뒷좌석에 탔다. 그는 차 문을 닫으면서 우비를 벗었다. 아직 앳되어 보이는 청년은 피곤한지 눈 밑에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와 있었다. 그는 해맑은 표정으로 아스테르와 운전자석에 앉은 비서실장에게 인사했다.

“태워주셔서 감사합니다아~! 안 그래도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걱정했는데, 헤헤….”
“시간도 시간이고, 날씨도 이 모양이라 차도 많이 안 다녔는데 언제 차가 지나다닐 줄 알고 거기 서있었어요?”

아스테르는 잠시 제 옆자리에 앉은 청년 리오르의 안색을 살피더니 조수석에 있는 따뜻한 담요를 꺼내달라고 비서에게 부탁하였다. 바깥의 어두움과 대비되는 따뜻한 색의 극세사 담요는 무척이나 보드라웠다. 아스테르가 건네주는 담요를 받아든 그는 감사를 표하고는 담요를 꼭 끌어안으며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아, 어떤 누나가 거기 있으면~ 리오르를 도와줄 사람이 쨔잔~! 하고 나타날 거라고 했어요!”
“거기에 누가 있었다고요?”

이런 날씨에? 그러면 그 사람이 도와주면 될 일 아닌가?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들어차던 순간에 아스테르는 고개를 저었다. 그쪽도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 그래도 자신이 도왔으니 그걸로 된 것 아닌가. 당장에 급한 용무도 없으니 목적지까지 데려다주면 되겠다 싶어서 그는 천천히 운을 뗐다.

“혹시 목적지가 어떻게 돼요? 날씨도 별로인데, 최대한 근처까지 데려다 드릴게요.”

리오르는 신이 나서 자신의 목적지를 얘기했다. 마침 아스테르가 가는 도시와 똑같았기에 흔쾌히 데려다주겠다고 얘기했고, 차는 천천히 움직였다. 아직 회사까지 가려면 시간이 걸릴 터다. 그전까지 서류를 재차 확인하기 위해 그는 조금 전에 계약한 계약서를 들었다. 어? 곧 의아한 목소리가 옆에서 들린 탓에 쉽사리 집중할 수는 없었지만. 어느 순간 거리를 훅 좁혀온 리오르가 계약서의 회사명을 가리켰다. 하르모니아의 이름이 유명하니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기에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니었지만, 반대로 일반인이 하르모니아의, 그것도 사장의 차를 우연히 얻어 타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니 놀라울 만도 하였다.

“혹시 하르모니아 사장님이세요? 우와아…! 그런데 이렇게 태워주시고 너무 감사합니다!”
“하하, 그건 아까 얘기했잖아요? 그런 자리를 떠나서 이런 빗속에서 곤란하실 텐데 못 본 척 지나가는 것도 사람의 도리는 아니죠. 마땅히 했어야 할 일인 걸요.”
“사장님……. 너무 멋져요…!”

시선이 따갑다는 말은 이럴 때 쓰이는 것이리라. 초롱초롱한 눈빛이 저를 응시하자, 아스테르는 시선을 옆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크게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니고, 고작 빗속에 곤란한 사람을 태워줬다고 이런 눈빛이라니. 도대체 재벌이나 사장들에 대한 이미지가 어떤지에 대해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아무래도 이런 상황에서 제대로 투자 계약서를 확인하지는 못할 것 같아서 아스테르는 곧장 계약서를 서류 봉투에 넣은 후 물에 젖지 않게 옆으로 치워두었다.

차가 달리는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다. 그렇다고는 해도 초면인 그들이 많은 대화를 나누는 것은 아니었다. 어쩌다가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라던가, 다음에 하르모니아를 한 번 이용해달라는 그런 내용. 그렇다 보니 대화는 중간중간에 끊어질 수밖에 없었다. 리오르는 어쩌다가 이 상태로 나오게 되었는지 얘기를 하지 않으려고 했고, 극히 일부분만 드문드문 이야기했다. 그럴 때마다 비서실장이 부드럽게 이야기를 이어나가며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그 순간, 끼이이이익! 하며 시끄러운 마찰음과 함께 급제동이 걸렸다. 깜짝 놀라 아스테르가 놀란 마음을 진정하며, 비서실장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아니, 그게…. 방금 전에 앞에 뭐가 있었는데, 없네요…?”
“네?”

무슨 소리냐는 의미로 아스테르가 재차 묻고 나서, 그제야 옆자리에 앉은 리오르가 생각났는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아스테르는 괜찮냐고 물으려고 하다가 말문이 막혔다. 리오르는 눈을 가리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어깨를 잘게 떨고 있었고, 빨리 가주세요, 라는 말만 반복해서 하고 있었다. 조금 전 재잘대던 목소리와는 전혀 달랐다. 무언가에 겁을 먹은 듯한 목소리는 잘게 떨리고 있었다.

“리오르 씨, 괜찮아요?”

급제동에 놀란 것이라고 생각한 아스테르는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어깨의 작은 떨림이 손끝을 타고 느껴지자 살짝 흘러내린 담요를 어깨 위로 더 올려 덮어주었다. 그러고 나서야, 리오르는 겨우 고개를 들어 괜찮다고 작게 말했다. 어? 하는 의문이 담긴 소리는 그가 고개를 똑바로 들고난 뒤에 들렸다. 거짓말처럼 어깨의 떨림이 멎었다.

“없어졌어….”

조금은 멍한 목소리에 아스테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을 내렸다. 리오르는 한동안 계속 앞을 바라보고 있다가 아스테르를 만졌다가 떼기를 반복했다. 뭐가 없어진 것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리오르가 많이 놀란 것처럼 보여, 질문 대신 그는 비서실장에게 근처 편의점에 가서 마실 것이라도 사 오자고 얘기했다.

지독하게 내리던 비는 그 사이에 멎어있었다. 편의점에서 따뜻한 음료를 사온 아스테르는 그중 하나를 리오르에게 건넸다. 자, 마셔요. 리오르가 음료를 받아들자, 아스테르는 그 옆에 앉았다.

“아까 많이 놀랐어요?”
“아, 그거어~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사장님 덕에 다 진정됐어요!”

작은 웃음소리가 입술 새로 새어나간다. 조금 전과는 다르게 완전히 쌩쌩한 목소리에 안심이 된 것이다. 따뜻한 음료는 차가운 비 때문에 꽁꽁 얼어붙었을 몸을 녹여주었다. 안정감을 가져다주는 온기에 리오르는 눈을 지그시 감고 살포시 웃었다. 분명 아스테르와 닿았을 때 귀신이 사라졌다. 그와 닿지 않았을 때 보이던 그것이 그와 닿았을 때 사라졌다. 여태까지 사라져달라고 빌었던 시간이 무색하게, 단숨에. 이 사람 옆에 있고 싶다, 그렇게 생각한 것이 그 때문일 것이다.

“아, 다 마셨으면 갈까요? 아직 도착하려면 멀었으니까 차에서 조금 자도 돼요.”
“리오르는…, 아, 아니에요! 그럼 실례하겠습니다아!!!”

리오르는 무언가 말하려다가 순간 고개를 크게 가로저으며 말을 바꾸었다. 귀신들을 보고 난 이후, 밤에는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밤에는 낮보다 귀신들이 더 극성맞으니까. 낮에도 귀신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밤에 비하면 그럭저럭 잘 수는 있었다. 그렇다고 낮에 마음 편하게 잘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그마저도 얕게 자야만 했다. 그렇지만 이 사람이 옆에 있으면 괜찮지 않을까? 리오르는 차로 돌아가면 조심스레 손잡고 자도 되냐고 물어봐야지, 라는 생각에 웃으며 차로 가벼운 걸음을 옮겼다.


*


“그러니까, 그때 제 손을 잡고 잤더니 귀신들이 괴롭히지도 않고 푹 잤다는, 말인가요?”

아스테르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분명 마음이 진정되지 않은 것인가, 걱정이 되는 바람에 손을 잡고 자라고 말하긴 했었다. 무사히 집까지 데려다주었는데 이렇게 찾아와서 다짜고짜 ‘당신 덕에 귀신이 보이지 않게 되었으니, 당신과 같이 있고 싶다.’라니. 그렇다고 리오르가 거짓말을 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기에 아스테르는 낮게 숨을 내쉬었다. 만약 다크서클이 이렇게나 내려온 것도 귀신 때문에 밤에 제대로 잠을 못 자서 그런 것이라면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곳을 지나가는 것이 하르모니아 사장일 줄은 누가 알았겠으며, 그런 것으로 거짓말을 친다고 하기에는 우연이 너무 많이 겹쳤다. 차라리 그가 정말로 귀신을 볼 줄 알고, 자신과 닿으면 귀신이 안 보이고 들리지도 않는다는 말을 믿는 쪽이 더 신빙성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은 거예요? 나와 닿아서 귀신이 안 보이고 안 들리는 건 리오르 씨에겐 좋을 거예요. 그렇지만 매일 만나거나 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지 않나요?”

아. 짧은 탄식. 차마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리오르의 눈동자가 오갈 데가 없이 흔들린다. 열심히 무어라도 생각하려는지 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단순히 손을 잡는 등의 스킨십이라면 도와주는 것이 어려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서 아스테르가 먼저 어떻게 도와주겠다고 얘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리오르, 뭐든지 시키면 다 잘해요! 귀신 보기 전까지는 공부도 엄청 잘했구~, 그러니까 부탁드릴게요, 네?”

아스테르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그를 모른 척하기에는 너무 양심이 찔렸다. 벌써부터 그렇게 어려운 사람의 부탁을 거절했느냐고 호되게 혼을 내실 부모님의 목소리가 귓전을 울린다. 고심 끝에 이력서를 작성해서 가져오라고 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기로 했다. 리오르는 몇 번이고 감사 인사를 표하고는 재빠른 걸음으로 사장실을 나섰다.


*


회사에서는 마땅한 자리가 없다, 그것이 아스테르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렇지만 사장의 개인비서라면 별다른 제약 없이 회사에 들락거릴 수도 있고, 늘 같이 붙어있을 수도 있다. 모종의 이유로 현재는 휴학을 하고 있다고 적혀있기는 했지만, 이전에 비서로 일한 적도 있었다. 일한 기간이 짧은 것은 분명 귀신 때문에 무서워서 그만둔 것이라고 얼핏 들은 기억이 있다. 그런 점이라면 아스테르가 해결해줄 수 있는 문제니,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비서로서 채용이 되었다는 점을 크게 산 것이다.

후. 짧게 숨을 내뱉은 아스테르는 리오르에게 문자를 보내고 나서 푹신한 의자에 몸을 느긋이 기댔다. 벌써부터 머리와 눈꺼풀을 무겁게 짓누르는 피로에 금방이라도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는 이내 곧게 앉아 너른 책상 위에 올려진 두둑한 서류들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하얀 목재로 만들어진 깔끔한 필통에서 제법 값이 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만년필을 꺼내 서류를 꼼꼼하게 살펴보고 필기체로 서명을 했다. 같은 행위를 몇 번이고 반복하던 그는 노크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사장실로 들어온 비서실장이 다음 일정에 대해 짧게 안내했다. 그가 왼손에 찬 손목시계를 확인해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매장을 돌면서 상태를 살펴보는 시간이다.


*


특별하게 이상이 있는 곳은 없었다. 서비스 면에서 부족한 면은 없었으며, 점원들의 친절 응대에 상가 매출도 좋은 편이었다. 모든 매장에 장점을 살리고자 좋은 부분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고, 한편으로는 단점에 대해 보완하는 방법까지 얘기를 해주느라 아스테르가 한 매장에서 머무는 시간은 꽤 오래였다. 번쩍이는 불빛 아래 먼지 한 톨도 나올 것 같지 않을 정도로 청결한 매장 내부를 보며 그는 내심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마지막 매장의 상태를 살펴보기 위해 걸음을 재촉하던 그때, 주위가 웅성거렸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는지, 걱정이 앞선 아스테르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고객과 점원 모두 그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무슨 일입니까?”
“아, 사장님…! 그게….”

매장의 매니저는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더구나 발목을 삐었는지, 한 쪽 단화를 벗고 있는 상태였다. 단화의 굽이 높은 편은 아니었으나, 아마도 불편한 치마 탓에 움직이다가 다리를 삔 것이겠지. 사장님이라는 말에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우글거리던 인파가 조금씩 자리를 비켜 아스테르가 지나갈 길을 만들어주었다. 아스테르가 앞으로 걸음을 내딛자, 바닥에 쓰러져 부서져있는 마네킹이 보였다. 마네킹에게 입혀진 옷은 짙은 네이비의 드레스로 무릎이 살짝 보이는 길이에 라운드 넥이었다. 라운드 넥을 따라 반원의 형태로 눈물 모양의 비즈가 박혀있었다. 소매는 팔꿈치를 조금 가리지 못하는 길이. 심플한 디자인은 단아하면서도 세련된 느낌을 주었기에 한창 인기가 있는 상품이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다친 사람은 없어요? 매니저님은 발목을 삔 것 같은데.”

다행히도 매니저가 발목을 삔 것을 제외하면 부상을 입은 사람은 없었다. 매니저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대략 나흘 전부터 마네킹이 흔들거리며 넘어질 뻔했다는 것이다. 다른 마네킹은 멀쩡했으나, 지금 바닥에 넘어진 마네킹만 그러했다. 혹시 바닥이 평평하지 않아서 그런 것인지 재차 확인을 했으나, 바닥이나 마네킹에는 이상이 없었기에 의아하던 차였다. 그러다가 사달이 난 것이다. 한 손님이 옷을 구매하고 나가는데 손님 쪽으로 마네킹이 쓰러지는 것이었다. 그것을 발견하고 매니저가 급하게 손님을 보호하기 위해 그녀를 잡고 멀리 뛰었고, 그 도중에 발목이 삐었다는 것이다.

“…천만다행이네요. 마네킹이 부서지면서 다친 분은 없는 것 같으니. 고객님께서는 괜찮으신가요?”
“매니저님 덕분에 괜찮아요. 놀란 것 말고는 없어요.”

아스테르는 그곳에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온 보안팀을 불러 청소팀을 불러 부서진 마네킹 파편을 치우게끔 하라고 얘기했다. 그리고 CCTV를 확인하여 수상한 움직임을 보인 사람은 없었는지 확인하라고 했다. 보안팀의 사람들은 지시를 받고 빠르게 움직였고, 아스테르는 마네킹 파편이 튀어 자칫 밟으면 위험하니 물러나달라고 고객들에게 정중하게 부탁하였고, 많던 인파는 서서히 물러났다.

여전히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상태를 살펴보던 그의 눈에 이상한 점이 들어왔다. 조금 전 다칠 뻔했다는 고객이 산 쇼핑백 안이 우연히 보였는데, 어딘가 익숙한 디자인이었다. 그가 다시 마네킹으로 시선을 돌리자 똑같은 의상이 입혀져 있었다. 우연은 아니겠지. 애써 불길한 느낌을 지우려 애쓰며 그는 매니저를 불러 물었다.

“혹시 마네킹이 언제 흔들렸는지 알아요?”
“사실, …고객님들이 마네킹에 입혀진 옷을 사 가려고 하실 때 마다요. 그래서 다른 분들께서는 무섭다며 사 가지 않으셨는데….”

그는 대답 대신 침묵을 선택했다. 이런 미신 같은 걸 믿지 않는 것을 직원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얘기를 꺼낸 매니저는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매니저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아스테르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믿는 것은 아니지만, 찝찝한 마음을 떨쳐낼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아마도 리오르가 귀신을 볼 수 있다는 얘기를 해서 그럴 것이다. 그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주소록을 살피더니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몇 번의 신호음 끝에 상대가 전화를 받자 아스테르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리오르 씨, 미안한데 지금 당장 여기로 와줄 수 있어요?”


*


“사장니이이이임~~~!!!”

저 멀리서부터 텐션 높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급하게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자, 아스테르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른 채 헉헉거리며 달려오던 리오르는 그의 앞에 서서 숨을 고르며 양손으로 무릎을 짚은 채 허리를 숙였다. 천천히 숨을 고르며 무슨 일이냐며 드문드문 물어오는 질문에 그는 한 텀을 쉬듯 대답을 미뤘다. 숨 정도는 쉬고 나서 이야기를 해주려는 것이다. 더구나 그가 리오르를 부른 것은 어디까지나 정황상의 추측일 뿐, 확신은 없었다. 보이지 않는 사람이 확신하면 얼마나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그저 확인차, 인간이 아닌 ‘무언가’의 소행인 것인지 살피려는 의도다.

어느 정도 리오르의 숨소리가 잦아들자, 아스테르는 차근차근 상황을 설명했다. 이 장소에서 있었던 오로지 사실인 것에 대해서만. 그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어수선한 매장 분위기와 마네킹이 쓰러졌던 부분의 허전한 공간, 아직 청소팀이 치우지 못해 널브러진 마네킹의 파편 조각들이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그런데 사장니임, 리오르는 왜 부르셨스어아아아아아아아아!!!”

호흡이 그제야 돌아오자, 리오르는 숙였던 허리를 폈다. 문제는 그와 동시에 비명을 지르며 아스테르를 꼭 안아버렸다는 것. 그것도 어딘가에 숨어버리려고 한 것인지 그의 정장 재킷 안쪽으로 얼굴을 집어넣은 채. 갑작스러운 상황에 아스테르는 가만히 선 상태로 굳어버렸고, 매장의 직원과 근처를 지나가던 고객 모두 그 상황을 보며 경악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기, 리오르 씨.”

이러면 곤란한데. 아스테르가 애써 웃는 낯으로 그를 제 재킷 안에서 나오게끔 하여 그의 팔을 단단히 붙들었다. 리오르의 말에 의하면 이렇게 했을 때 분명 귀신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도 지금은 우선 그를 진정시키는 것이 중요했다. 귀신을 보고 싶지 않다고 하는 사람에게 이런 것을 강요하는 것은 내키지 않았지만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이대로 사태가 해결되지 않아 더 큰 피해가 생기는 것보다는 나았다. 미안해요. 아스테르가 낮게 읊조렸다.

“보기 싫다는 거 알아요. 그렇지만 내 부탁 들어줄 수 없을까요? 당신은 조금 전에 봤잖아요.”

아스테르는 리오르에게서 천천히 손을 뗐다. 리오르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돕겠다고 했으면서 하는 소리가 고작 이런 것이라니. 자책감에 그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얼굴을 들고 마주하는 것이 무서울 것이다. 귀신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어떤 형태로 보이는지 알 길이 없는 사람에게는 두려움의 깊이를 상상하기 어려웠다.

“사람이 다쳤어요. 이번에는 발목이 삐는 것으로 끝이 났지만, 다음에는 그렇지 않을지도 몰라요.”
“…리오르, 정말 무서운데…, 그래도 사장님이 이 문제 해결할 때 옆에 같이 있어주세요. 그러면 조오금 덜 무서울 것 같아요….”
“물론이죠, 이 문제는 제가 해결할 거예요. 그러니까 나를 조금만 도와줘요.”

기운 없는 목소리에 아스테르의 죄책감만 쌓여간다. 숨을 삼킨 리오르는 고개를 든다. 아스테르가 설명한 ‘문제의 옷’이 어떤 것인지는 디자인이 어떤 것인지 듣지 않아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머리가 허리까지 내려오는 귀신은 네이비 색의 드레스를 끌어안으려 몇 번이고 팔을 뻗었다. 그럴 때마다 통과하는 탓에 애처로운 울음소리를 내었다. 고객들이 그 드레스를 구경할 참이면 일부러 드레스 자락을 건드려 건드리지도 못하게 두려움을 심어주었고, ‘이 드레스는 내 거야.’라며 몇 번이고 말을 되풀이했다.

“저어, 매니저님…, 혹시이, 이 드레스 사려고 하셨던 분 계세요? 그러니까 마네킹이 움직이기 전이라던가아….”
“글쎄요…. 이 상품은 워낙 인기가 많은 상품이라……. 아, 그러고 보니 인상에 남는 고객님이 계셨어요.”

매니저의 말에 따르면 이러하다. 이 옷을 꼭 사겠다고 했는데,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이 아직 다 들어오지 않아서 꼭 한 벌을 남겨달라고 부탁하고 간 고객이 있었다고 한다.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아, 이제야 자신이 번 돈으로 마음에 드는 옷 한 벌 마련하는 처지였던 모양이다. 심지어 사흘 뒤에는 꼭 올 것이라고 신신당부까지 하고 나서 갔는데, 사흘을 훌쩍 넘긴 아직까지 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분명 모종의 사건이 있어서 죽은 탓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이겠지. 리오르는 시선을 귀신에게로 옮겼다. 순간 마주친 섬뜩한 기운에 당장이라도 눈을 질끈 감고 싶었지만, 그것을 참기 위해 그는 옷자락을 꾸욱 쥐었다.

또다. 귀신은 멋대로 리오르에게 겁을 주고 부탁을 한다. 여태까지 그래왔듯이. 그녀는 아마 자신이 죽은 장소로 향할 것이다. 드레스를 흘끗 바라보던 리오르는 주머니에서 자신의 카드를 찾았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아스테르가 제 카드를 꺼내 매니저에게 건넸다. 드레스를 구매해서 그것으로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는 몰랐으나, 일을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말한 것은 다름 아닌 그다. 이런 일에 리오르가 돈을 쓰게 할 생각은 아니었다. 매니저는 아스테르의 말을 듣고 쇼핑백에 드레스를 곱게 접은 채 넣어, 그의 손에 들려주었다. 아스테르는 마지막으로 매장 관리를 잘 부탁한다고 말하고서는 리오르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


건물 외벽은 상당히 오래된 멋이 느껴지는 벽돌이었다. 누런 담장 너머에 있는 집은 작지만 초라하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집의 외관과 동떨어지는 초인종 모양새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하얗고 긴 손가락이 벨을 울린다. 누구세요. 낮고 기운이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바짝 긴장한 리오르는 말을 약간 더듬으며 답했다.

“하, 하르모니아에서 나왔습니다. 드릴 물건이 있어서요.”

달칵. 문을 열고 나온 여성의 눈가는 붉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짓무른 채였고, 눈 밑에는 거뭇거뭇하게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몇 날 몇 끼를 먹지 않은 것처럼 핼쑥해 보이는 인상의 여인은 초췌한 눈빛으로 두 청년을 올려다보았다. 짙은 고동색 눈동자는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빨리 가달라는 의미를 담은 듯했다.

“이거, 드리려고 왔어요. 따님이 정말 가지고 싶어 했던 옷이어서요. 고객님이 마음에 들어 하셔서 두고두고 마음에 걸렸어요.”

여인의 눈동자가 둥그렇게 뜨인다. 더 이상 눈물조차 흘리지 못할 것 같던 눈동자에는 다시금 눈물이 고인다. 어여쁜 드레스를 꺼내 끌어안은 그녀는 제 딸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슬피 운다. 세상이 무너질 듯, 현관문 앞에서 쓰러져 그렇게 한참을 목 놓아 울었다. 슬피 우는 여인을 달래며 그의 눈동자가 어디론가 향한다. 보이지 않는 이들에게는 그 눈빛이 공허해 보일 것이다. 눈부시게 쏟아지는 햇빛이 애처롭기만 하다. 무섭게 보이던 귀신도, 어느 순간 말쑥한 모습으로 그를 응시한다. 고맙다고 말하듯 눈물을 보이며 이내 빛처럼 흩어져 사라져간다. 한이 풀린 영혼이 바람을 타고 흩어지는 것을, 리오르는 하염없이 바라보고만 있다.


*


그 뒤로 2주가 지났다. 그 사이에도 몇 번이고 귀신 때문에 소동이 일어났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기에 아스테르는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무서우면 제 손을 잡아도 좋고, 안겨도 좋다고 말했다. 그러나 리오르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때때로 무서워서 그를 와락 안아버릴 때도 있었으나, 귀신 때문에 곤란해진 사람들이 있었기에 그들을 돕기 위해서 귀신들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래서, 많이 무서웠어?”

이번에는 와락 안겨버린 경우지만. 아주 무서운 귀신을 보는 바람에 사장실로 도망을 와서 제 품에 안기는 것을 보고 도무지 떼어낼 수가 없었다. 아스테르는 그가 진정할 수 있게 등을 천천히 쓸어주었다. 어깨의 작은 떨림이 멎어가는 것을 느낀다. 제 심장 부근을 간질이는 다른 고동이 느껴지고, 작은 입에서 나오는 호흡이 가슴 부위를 덥게도 만든다.

“괜찮아. 이제 안 보이잖아.”
“아스는 다정해. 리오르가 이렇게 안겨도 친절하구.”
“이런 면에서 거절을 잘 못하는 것뿐이야.”

그래서 리오르가 아스의 힘이 되어주고 싶어. 그 말에 아스테르는 손을 멈췄다.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는 것을 잘하는 아스테르에게, 이런 말의 진위 여부를 판별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별의 이름을 가진 그는 진실과 진심 앞에서 늘 무너지고는 했다. 하늘을 밝게 비추는 별답게, 위선과 거짓을 싫어하듯.

“사람들이 그랬어. 아스는 첫사랑의 저주를 받았대. 그렇지만 사람들이 틀렸어. 그런 저주가 어디 있어…! 정말 사랑하면 지켜줄 텐데.”
“푸흐, 맞아. 그저 내가 추구하는 가치관과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관이 다를 뿐이야.”

좋은 집안의 자제로 태어나, 부족함 없는 삶을 살아왔다. 화목한 가정에서 삐뚤어질 일 없이 곧게 자란 아스테르는 당연하다는 듯 회사를 물려받게 되었다. 이익에 눈멀고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바쁜 사람이 되기 쉬운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의 집안은 예전으로 치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집안이었다. 하르모니아는 원래 이익을 추구하는 회사이기는 했으나, 사회적 기업으로 더 유명했다. 수익금의 일부는 꾸준히 기부를 하고 있으며, 사회적인 이슈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부모님도 늘 그에게 바르고 올바르게 자라야 한다고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얘기를 하고는 했다.

그런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스테르는 위선을 싫어했다. 이득과 사리사욕만을 추구하고, 인간 됨을 잃어버린 짐승과도 같은 이들을 싫어했기에 여태까지의 약혼도 전부 파혼이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아스테르 본인도, 그의 부모님도 원치 않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의 파혼이 줄을 잇자, 사람들은 첫사랑의 저주라느니 헛소리를 지껄여댔다.

“있지이~, 아스 첫사랑은 아스를 지켜주고 있어, 지금도.”

그가 상념에서 빠져나오게 된 것은 리오르의 나직한 목소리 때문이었다. 평소와는 조금 다른 톤, 해맑게 얘기하는 목소리와 두려움에 덜덜 떠는 목소리가 아닌. 그는 그 말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모른 채 멍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리오르가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아스테르를 올려다보았다.

“…리오르, 본 적 있어. 아스 옆에 있는 사람. 아스가 무척이나 소중하다고 그랬어.”
“…라베를, 만났어?”

그가 18살이 되던 해에 만난 소녀. 같은 나이 또래였던 소녀는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소년에게 다가왔다. 당당하고 당찬, 그래서 더 빛이 나는 소녀였다. 그런데 그 아이는 이미―.

“죽은, 거지? 라베가 말해줬는데. 아스랑 라베랑 엄~~청 사랑하는 사이였는데, 나쁜 사람들 때문에 라베가 아스 지켜줬다고.”

리오르는 말을 하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쿡쿡 아려왔다. 한 걸음, 그는 뒤로 물러났다. 아직도 그 아이를 가슴에 담아두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자신은 이곳에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이라도 했는지. 사장실은 침묵이 감돌았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들어오는 햇살이 바닥이 부딪혀 으스러진다. 긍정의 침묵인 걸까. 쿡, 리오르의 가슴에 못 하나가 더 박힌다.

“그래서 이제는 리오르가 아스를 지켜줄 거야. 아스으~ 요 며칠간 잠 제대로 못 잤지이!”

부드러운 목소리는 다시금 한 층이 올라갔다. 평상시의 밝은 목소리. 아니, 처음 그들이 만났을 때보다 더 밝은 톤이었다.―귀신들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자던 리오르가 아스테르 덕분에 몇 번을 편하게 잠들었으니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허리에 당당히 손을 올리며 말했다. 리오르의 말대로 그가 며칠째 제대로 잠을 못 잔 것은 사실이다. 단순히 피로가 누적되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스테르는 제대로 서있기가 힘들어져 테이블에 몸을 기댄다. 그의 흐린 시야에도 리오르의 손이 살짝 떨리는 것이 느껴진다.

“리오르…?”

설마 귀신이라도 보이는 것인가. 아스테르가 손을 뻗자, 리오르가 단호히 그의 행동을 끊어낸다.

“지금 리오르한테 손대지 마, 아스.”
“리오―,”
“못된 귀신들 혼내줄 거니까.”

이름을 부르려다가 날카로운 목소리에 그의 음성이 끊긴다. 곧 리오르는 그의 뒤쪽―허공이라고 하는 편이 좋을까. 허공을 향해 잔뜩 노려본다. 무서운 것들을 마주하면서, 겁이 나면서도.

“그러니까 아스 괴롭히지 마!”

날카로운 목소리에 귀신들은 일제히 리오르에게 달려들고 더럭 겁이 난 리오르는 팔로 눈앞을 가렸다. 그러나 그 순간, 파지직! 하고 타는 소리가 나더니 번쩍이는 하얀 섬광이 리오르의 눈앞에 튄다. 그가 고개를 들자 어른거리는 한 영혼이 보인다. 길게 머리를 늘어뜨린 여인은 머리를 땋고 있었고, 익숙한 하얀색 가운을 입고 있었다.

「대견하네, 우리 아들. 이제 엄마가 걱정 안 해도 되겠네.」

“……엄마?”

흰 피부에 방울진 눈물이 흘러내린다. 악귀들과 함께 리오르의 시야에서 여인이 사라진다. 엄마! 가지 마! 리오르 두고 가지 마! 애처로운 울음이 뒤섞인 외침이 무색하게 영혼들이 성불한 것 마냥 바람처럼 사라져버린다. 그의 중심을 유지하고 있던 축이 무너지고, 아스테르는 그를 받아들기 위해 몸을 기울였다. 그 역시 힘이 빠진 상태였기에, 딱딱한 대리석 바닥에 넘어지고야 말았다. 그 소리를 들은 비서실장이 들어오면서, 모든 상황은 정리되었다.


*


그것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어색한 감각에 리오르는 제 주먹을 쥐었다 편다. 그게 무슨 상관이랴. 그는 팔을 쭈욱 뻗어 단단한 상체를 끌어안는다. 보드라운 이불의 감촉과 단단한 몸. 침대 머리맡에 부서지는 햇빛을 등지고 돌아누워 고른 숨을 내뱉으며 잠든 아스테르를 올려다본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났을 때는, 사장실 옆에 있는 작은 휴식 공간. 그 뒤로 의식을 잃고 넘어지는 바람에 아스테르와 같이 잠들었다고 비서실장이 언질 해주었다. 아스테르의 마음이 동한 것은 솔직하게 대하는 리오르의 태도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운 일의 연속이었지만, 자신을 지키기 위해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모습에 심장이 쿵, 하고 울렸다던가. 리오르 본인은 다정하게 대해주는 아스의 모습에 진즉 마음을 뺏겼다고 했지만. 이후, 그들은 만남을 진지하게 고려해보았다.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하거나 같이 있는 시간을 늘리거나. 몇 번을 더 만나고서야 아스테르의 쪽에서 먼저 고백을 했다. 그리고 그날, 아스테르의 집에서는 아주 난리가 났다. 그의 부모님은 리오르를 격하게 반겨주었다. 벌써부터 결혼을 약속한 것 마냥 아스테르를 잘 부탁한다느니, 뭐라니. 반대를 하지 않은 점에서 아주 감사하다고는 할 수 있겠지만.

두 사람의 나이도 나이다 보니, 그들은 빠르게 동거를 시작했다. 우선 살아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핑계로, 더 오랜 시간을 같이 하고 싶어서. 안 그래도 다정하던 아스테르는 꿀을 바른 듯 더 달콤해졌다는 것이 리오르의 견해이다. 애칭을 부르고, 사랑한다고 속삭이고. 이렇게 될 날이 오기까지, 그녀는―리오르의 양 어머니 실리아는 그의 곁을 지켰던 것일까.

「리오르는,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 다시 리오르 앞에, 나타나주면 안 돼?」

어쩌면 귀신을 볼 수 있게 된 것도, 갑작스러운 실리아의 죽음 때문에 쇼크를 받은 탓일지도 모른다. 혹은 그때의 말 때문에 다시 한 번 그녀를 보기 위해서. 귀신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말에 아스테르는 잠시 놀란 듯싶었지만 이내 다행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를 멀리 두지 않았다. 그래서 데이트까지 이어진 것이겠지만.

“…루?”
“깼어~??? 아스는 잠꾸러기야아~.”
“좋은 아침, 루….”

나른한 목소리를 내며 고개를 부벼오는 것이 커다란 짐승이 애교를 부리는 것 같다. 사랑해, 아스~! 응, 나도 사랑해. 더는 아픔도 남지 않은 달달한 고백만이 그들의 사이를 가득 메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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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가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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