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달이 밝은 날이다. 어두운 서고에서 소년은 달빛에만 의지해서 책을 정리하고 있었다. 서고에 어지럽게 쌓여있는 책들을 두고 원하는 책을 찾을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소년의 부모님이 두 분 다 의사여서 바쁜 탓에 이렇게 혼자 있는 날이면, 이러한 뒷정리는 어김없이 소년의 몫이 된다. 소년이 책을 찾으러 서고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이것들을 정리할 이유도 없었겠지만, 마침 오늘 꼭 찾아야 하는 책이었으니 정리는 불가피했다. 책장에는 각종 의학서적과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동화책들이 가득이었다. 종종 어려워 보이는 소설이나 자서전이 있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겨우 책정리가 끝났을 즈음, 소년은 책상 위에 있는 마지막 책을 집어 들었다. 다른 책들이 쌓여있는 탓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제목이 적혀있지 않은 다소 특이한 책은 그 표지에 황도 12궁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고, 책의 뒷면에는 북극성을 중심으로 한 여러 별자리들이 그려져 있었다.

“어라아~? 이런 책이 있었던가아~?”

어둠 속에서도 소년의 햇살과 같은 금안은 신기하게 생긴 책을 보며 반짝 빛나고 있었다. 서고의 의학 서적과 부모님이 읽는 소설이나 자서전 같은 것을 제외하고는 소년이 전부 보았던 책들이다. 척 보아도 의학 서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표지에 그는 고개를 갸웃이다가 이내 책을 펼쳐보기로 했다. 표지에 별이 그려져 있으니, 어쩌면 별에 관한 이야기가 담긴 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말이다.

“으와아아아아아아앗~!!!”

그가 책을 열자마자 갑자기 눈을 멀게 할 정도로 강한 빛이 책에서 뿜어져 나왔다. 갑작스러운 상황이 닥치면 누구라도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떨어트릴 것이다. 책이 바닥에 떨어지며 둔탁한 소리를 내었고, 아주 잠깐이지만 바람이 일렁이며 소년의 머리칼을 간질였다. 서고 내부의 창문은 열 수도 없는데 어디서 불어온 바람일까. 이내 눈꺼풀을 두드리는 빛이 수그러들고 무거운 어둠이 찾아오자, 그제야 눈을 뜰 수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요가 찾아오자, 소년은 의아해하며 무릎을 굽혀 책으로 손을 뻗었다.

“너구나, 날 깨운 게.”

어디선가 들려오는 작은 목소리에 소년은 온 몸의 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 들었다. 분명 부모님은 급한 수술이 잡혔다며 오늘 밤에는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설령 수술을 마치고 돌아왔다고 하더라도 이 목소리는 부모님의 것과는 다른 생소한 이의 것이었다. 조용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에는 전혀 섬뜩한 기운이라고는 섞이지 않았으나, 주변에 아무도 없을 것이 뻔한 상황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작은 소년에게 공포감을 심어주기에는 충분했다. 목소리가 어디서 들려오는지 찾을 생각도 않고 굳어있던 소년은 곧 창문 새로 비치는 빛 위로 드리워지는 그림자를 보고야 말았다.

“저기, 내 말 듣고 있어?”

이어 목소리가 다시금 귓가에서 들리자, 소년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아보았다. 으아아아악!!! 그가 찢어질세라 소리를 지르자, 인영도 그에 놀란 듯 아까보다 멀찍이 거리를 두고 멀어졌다. 후하, 후하. 몇 번이고 숨을 고르던 그는 뒤늦게야 상황을 파악했다. 제 눈동자에 비치는 것은 양 인형처럼 생긴 형체가 공중에 붕 떠서 날고 있었고, 목에는 별이 달린 리본을 하고 있었다.

“너, 너는 누구야아…?”

생각보다 귀여운 외형에 안심했는지, 그는 한결 진정된 어조로 물었다. 인영은 아주 잠시 고민하다가, 왜 소년이 저를 보고 소리를 질렀는지 잠시 생각해보았다. 세상에 살면서 어떤 인간이 저와 같은 특이한 존재를 보겠는가. 그런 인간은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적을 것이다. 더구나 밤이고, 상대는 11살 남짓 되는 아이며, 그에게서 마력이 느껴진다고 하여도 마법에 대한 지식이 없는 자일 수도 있다. 이내 인영은 부드럽게 웃으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나는 에투왈. 아서 해서웨이라는 마법사가 만든 별의 수호자야. 그가 만든 마기아 카드라는 걸 지켜야한다는 소명을 가지고 태어났어.”
“마법사? 별의 수호자? 마기아 카드으…? 그게 뭐야~?”

어린 시절일수록 이런 판타지 세계 속 이야기 같은 것에 관심이 많다고 하던가. 경계라고는 사라진 소년의 모습에 에투왈은 낮게 웃었다. 묻고 싶은 게 많을 것이라는 건 이해해. 에투왈이 짧게 덧붙였다. 밤은 길고, 설명해줘야 할 것들은 무수히 많았다. 에투왈은 재미있다는 듯 그가 해야 할 말들을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잘 전달할 수 있을까 머리를 굴렸다. 얼마나 잠들어있었는지 에투왈 본인이 가늠하기는 어려웠으나, 간만에 잠에서 깬 것은 확실하다. 그렇게 자신을 깨운 것이 이런 어린 아이라니. 이런 상황은 상상도 하지 못했지만, 그에게 맞추어 설명을 하려면 조금의 시간을 들여야 할 것이다.

“우선 책부터 들고 방으로 갈까? 설명해줄 것이 많아.”
“그러엄~ 리오르 방으로 올라가자~!”

자신을 리오르라 칭한 소년은 바닥에 떨어트렸던 책을 주워 들고는 에투왈과 함께 재빨리 그의 방으로 향했다. 서고에 책을 찾으러 왔다는 생각은 완전히 깜빡한 채 말이다.



*



“부르셨습니까, 어머니.”

창 밖에는 짙은 구름이 물러가고, 별들은 어두운 하늘을 수놓았다. 어른거리는 달빛이 커튼 사이를 비집고 바닥에 길게 제 빛을 뽐내고, 정원에 심긴 나무들의 그림자가 그 위로 드리운다. 달그락. 찻잔과 접시가 부딪히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여인의 목소리가 들린다. 조금 전 제 소리를 내어 그가 왔음을 알린 앳된 소년의 어머니이리라.

“아스테르, 마기아 카드(Magia Card)가 나타났단다. 그것도 네덜란드에서.”

영국에서 마법사 가문으로 자리를 단단하게 잡은 해서웨이 가(家)는 마법 협회에서도 오랫동안 굳건한 위치에 있었다. 그 시초를 따라 올라가면 그곳에는 당대 최고의 마법사 아서 해서웨이가 있다. 그가 죽은 지도 어언 200년 전, 그의 죽음과 동시에 도난당하여 사라진 마기아 카드가 드디어 오랜 봉인의 세월에서 깨어난 것이다. 그것의 소년의 어머니이자 현 해서웨이 가의 가주인 이디스 해서웨이가 얘기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 마기아 카드를 만든 그 장본인이 아서 해서웨이니 말이다. 그러니 해서웨이 가는 그것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고 있으며, 되찾아올 이유도 있다. 그 모든 것을 말하지 않아도 소년, 아스테르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디스는 그의 굳게 다짐한 표정을 보며 웃었다.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가 없었다.

“할 수 있겠니?”

당대 최고의 마법사, 아서 해서웨이. 그리고 그가 자신의 마력으로 만든 마기아 카드. 그것을 손에 얻어, 다룰 수 있게 된다면 필시 제 마력도 강해질 것이다. 그것은 곧 어머니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그러니 아스테르가 거절할 이유는 하등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그녀의 앞에서 기사처럼 한 쪽 무릎을 굽혀 경례를 표현한다.

“물론이죠, 어머니.”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소년은 그 말을 끝으로 일어나 방을 나갔다. 날이 밝으면 네덜란드로의 유학을 위한 준비가 빠르게 준비될 것이다. 이디스는 슬픔이 어린 눈으로 그가 나간 방향을 바라본다. 그녀는 이내 시선을 거두고 창밖을 바라본다. 유난히도 달이 밝은 것과 마기아 카드가 그 봉인이 풀린 것은 어떤 상관이 있는 것일까.

“조만간 폭풍이 몰아치겠어. 아스테르, 잊지 마렴. 강한 힘은 강한 힘을 불러온다는 것을.”

날카로운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우는 소리가 적막한 방 안을 가득 메운다. 곧 바람이 잦아들고, 어두운 암흑이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깊은 어둠이 찾아왔다.



*



흐아아아…. 기운 빠진 목소리와 동시에 리오르는 제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둥둥 떠다니고 있던 에투왈이 그 옆으로 날아와 작은 소년의 어깨를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고생했어, 라는 짧은 위로의 말을 전하면서 말이다. 이로써 세 번째 시험이 끝이 났다. 제 아무리 초등학교 8학년이라 학교를 일찍 마친다고 해도 일주일 사이에 세 번이나 카드의 시험을 치르기는 힘든 일이었다. 리오르는 숨을 고르고 나서야 몸을 일으켜 앉아서는 손에 쥐여진 카드를 바라보았다. 꽃(Flos)의 카드 [플로스], 빛(Lumen)의 카드 [루멘], 마지막으로 오늘 시험을 치른 방패(Parma)의 카드 [파르마]. 이제까지 얻은 카드들이 내주는 시험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기에 쉽게 얻을 수 있었다.

[플로스]는 그녀의 정원에 리오르를 데리고 가, 10송이의 꽃들의 꽃말을 알아맞히게 하였다. 꽃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소년은 그 정도는 쉽게 알아 맞혔다. 빛과 가장 어울리는 것을 가져오라고 한 [루멘]에게는 [플로스]를 사용해서 해바라기를 가져다주었고, 늘 해만을 바라보는 해바라기가 마음에 드는지 [루멘]은 그를 주인으로 인정했다.

“오늘 [파르마]가 내준 시험은 [플로스]나 [루멘]보다는 어려웠지?”

에투왈의 말에 리오르는 으응, 하고 대답하며 제 교복에 달린 배지를 만지작거렸다. 중심에는 꽃잎 모양 같기도, 눈물 모양 같기도 한 푸른색 보석이 두 개, 그 오른쪽으로 나뭇잎 모양인지 날개 모양인지 금빛의 장식이 원을 그리듯 감싸고 있고, 그 끝에는 흰색의 별이 있다. 별은 푸른 보석 중에 더 작은 보석과 맞닿아있고, 커다란 푸른 보석 밑으로는 흰색의 꽃이 장식된 그런 모양이었다. 리오르가 달고 있는 배지는 처음부터 그러한 모양은 아니었다. 분명 처음에는 달과 별이 혼합된 열쇠와 같은 형태였고, 목에 걸 수 있게 목걸이처럼 되어 있었다.

에투왈의 말에 의하면 카드를 사용하기 위한 열쇠는 그것을 사용하는 주인에 따라 그 형태가 바뀐다고 하였다. 처음 마기아 카드를 만든 아서 해서웨이의 마력은 별이 그 근원이라고 하였다. 그렇기에 그가 만든 카드와 열쇠, 그리고 그 카드를 사용할 때 나타나는 마법진도 별과 유사한 형태라고 했다.

“처음에 에트가 리오르한테 그랬지? 리오르가 가진 힘은 별이 아니라 꽃의 힘이어서 리오르 열쇠는 꽃을 더 닮았다고.”

꽃잎 모양의 푸른 보석과 하얀색 꽃, 나뭇잎처럼 보이는 금색의 형태, 그리고 마기아 카드의 근본을 일러주는 새하얀 별까지. 리오르는 고개를 들어 에투왈을 바라보았다. 수호자는 아직도 그의 주인이자 친구인 리오르가 애칭을 부르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지 잠시 대답이 없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마력이 없는 자는 마기아 카드가 봉인된 책을 열 수 없다. 누군가가 마기아 카드를 훔쳐, 함부로 사용하지 않게 하려고 에투왈이 잠들면서까지 책과 카드의 힘을 봉인해두었던 것이다.

“리오르가 날 깨울 수 있었던 것은 마력을 가지고 있어서야. 아직은 어려서 마력이 그렇게 강하지는 않지만, 리오르처럼 착하고 선의를 가진 사람이면 마기아 카드의 주인이 되어도 좋아. 아서도 그걸 바랄 거고. 아직 정식 주인이 되려면 멀었지만 지금까지 훌륭하게 시험을 치렀잖아?”
“그렇지만 힘들었어어…. 오늘은 릴리에게 들키기도 하고오….”

부드럽고 온화한 카드일수록 쉬운 시험을 내준다. 강한 카드들은 자존심이 강하기 때문에 자신의 주인이 될 자에게 힘든 시험을 내준다. 방패의 카드 [파르마]는 누군가를 얼마큼 소중하게 여기는지, 그 마음을 시험한다. 그 시험 도중에 리오르의 친구인 릴리트가 휘말려버리는 탓에 상황이 복잡하게 꼬이게 되었다. 릴리트 데어는 그의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의 친구로, 그녀는 그를 제 동생처럼 여기며 소중하게 아껴주고는 했다. 외동인데도 또래에 비해 성숙한 면이 있어 늘 누나처럼 챙겨주고는 했었다. 오히려 리오르가 마법소년이 되었다는 소리에 눈을 빛내며 마법소년에게 걸맞은 옷을 만들어주겠다고 의욕이 활활 타올랐으니 두말할 것도 없다.

“그래도 괜찮지 않아? 오히려 릴리트는 비밀을 지켜준다고 했었잖아?”

소설이나 영화 속 주인공들에게 흔히 있는 조력자. 에투왈의 말에 의하면 그 역할을 딱 릴리트가 맡은 셈이다. 그런데도 리오르가 걱정을 하는 이유는 릴리트가 비밀을 누설할까봐서가 아니다. 싫든 좋든, 비밀을 지켜주고 옷을 만들어주거나 영상을 촬영한다고 하면 위험한 일에 휘말릴 수 있다. 자존심이 강한 카드는 어떤 시험을 내줄지 모를 일이니 말이다. 오늘만 해도 보이지 않는 방패에 부딪혀 릴리트가 높은 곳에서 떨어질 뻔한 것을 리오르가 [플로스]의 카드를 사용해서 나무줄기로 그녀를 잡아서 올려주지 않았다면 크게 다쳤을 수도 있었다.

“리오르 때문에 릴리가 다치진 않겠지이…?”
“역시나 그것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구나? 너무 걱정할 것 없어, 리오르. 나의 주인이 곤란한 일이 생긴다면 내가 힘닿는데 까지 도울 테니까. 카드가 내주는 시험을 직접적으로 도울 수는 없지만. 그리고 너라면 분명 해낼 수 있어. 난 그렇게 믿어.”

에투왈은 리오르의 눈앞으로 뽀르르 날아와 그를 마주보았다. 작은 양의 눈이 감겼다. 이내 별의 수호자 에투왈의 주변으로 미약한 빛이 일었다. 그가 전하는 말은 다정하고 상냥해서 기운 없이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던 리오르도 금세 밝게 웃었다. 그 표정을 보고 안심했는지, 에투왈도 빛을 거두었다. 밤이 늦었으니 얼른 자, 내일 지각하겠다. 늦은 시간까지 부재하는 일이 잦은 리오르의 부모님 대신, 부모 역할이라도 하듯 에투왈이 덧붙였다. 걱정 마~. 지금 바로 잘게에~. 기운이 없었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진 리오르는 이내 옷을 갈아입고 방의 불을 끄고는 자리에 누웠다. 폭신한 침대에 누우니 여태 참았던 피로가 몰려왔는지, 그의 눈이 스르륵 감긴다. 머리맡에는 교복에서 빼둔 배지가 있다. 그렇게 해두는 편이 마음이 편한지, 마치 그는 오랜 습관처럼 일주일을 꼬박 빼먹지 않고 그렇게 하고는 했다. 밤은 서둘러 깊어갔다.

꿈인가? 마을에 있는 수많은 풍차들 중에 하나가 리오르의 앞에 보인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는 풍차 지붕 위에 있는 검은 인영을 발견한다. 다른 곳을 응시하던 인영이 인기척을 느끼고 돌아본다. 꿈이어서 그런 것일까, 깊은 어둠 탓일까. 리오르는 자신을 바라보는 소년의 얼굴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다. 달빛 아래에 번뜩이는 검은 시퍼렇게 날이 서있었고, 날카로운 검을 쥐고 있는 소년의 행동은 우아하다 못해 올곧을 정도였다. 언뜻 비친 소년의 표정은 냉기가 서렸고, 황금빛의 들판과 같은 금안이 리오르와 마주쳤다. 저기, 너는―!

따르르르르릉!!!

“어, 라…?”

소년을 향해 말을 걸려던 찰나에 귓전을 울리는 알림 시계 소리가 들린다. 에투왈은 몸을 벌떡 일으켜 멍한 표정을 짓는 리오르에게 다가와 그의 시야 앞에서 몸을 움직인다. 에트~ 좋은 아침! 그제야 정신을 차린 그는 에투왈에게 간단한 아침 인사를 건넨다. 그에 화답하듯 수호자 역시 따라 인사한다. 시계는 아직 7시 1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잠깐의 이야기를 하기에 늦지 않은 시간이다.

“그래서? 무슨 꿈이라도 꾼 거야, 리오르?”

리오르는 느리게 눈을 끔뻑였다. 정말 짧은 순간의 변화도 알아차린 에투왈이 대단하다고 느껴서 그런 것일 터다. 꿈의 기억은 드문드문 잘려있었지만, 그는 자신이 기억하는 것을 전부 이야기했다. 꿈속에서 펼쳐진 이곳의 마을 잔세스칸스, 어느 풍차 지붕 위에 서있는 인영, 그리고 그 인영이 들고 있는 검, 싸늘한 소년의 표정과 또래처럼 보였던 점까지. 그의 말을 끝까지 듣고 있던 에투왈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어쩌면 예지몽일지도 몰라. 그가 짧게 말했다. 한 번도 꿔본 적 없는 예지몽이 지금 갑자기 왜? 리오르의 머릿속에는 의문이 맴돌았다. 이해하기 힘든 표정을 짓는 그를 보며 에투왈은 마력을 가진 자의 마력이 강할수록 예지몽은 더 자주, 그리고 정확하게 꿀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 외에도 이런저런 설명을 했지만, 요컨대 리오르가 예지몽을 꾼 이유는 조만간 마법과 관련된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징조라는 것이다.

“그럼 그 애도 마법사인걸까?”
“그건 나도 몰라. 그래도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에투왈은 그를 달래듯 말하고는 웃었다. 째깍. 시계는 7시 23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래층에서 델로스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자, 리오르는 서둘러 침대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놀러가는 날도 아닌데 웬일로 아침 일찍 일어나있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델로스는 의아하게 여겼지만, 좋은 게 좋은 것이라 생각하기로 하고 평소와는 조금 다른 아침 식사를 했다. 오늘의 식사당번은 실리아였는지, 델로스의 접시에는 살짝 타버린 팬케이크가 올라가있었다. 리오르는 포크로 팬캐이크를 잘라 시럽이 올라간 부분을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오랜만에 느긋하게 아침 식사를 한 리오르는 빠르게 등교 준비를 하고는 자전거에 올라탔다.

상쾌한 아침 바람이 햇빛에 반짝이는 베이지색 머리칼을 간질인다. 신나게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학교로 향하는 리오르의 마음은 가볍기만 하다. 꿈에 대해서 금방 잊은 것은 분명 에투왈의 조언 덕택이리라. 한참 주변 풍경을 바라보며 페달을 밟고 있자, 학교 운동장이 보였다. 이미 많은 학생들이 운동장에서 제 각기 좋아하는 운동을 하며 뛰어 놀고 있었다. 리오르는 자전거를 세워두고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리오! 오늘은 일찍 왔네! 뛰어놀기라도 하려고?”

으와아앗! 불쑥 튀어나온 릴리트 때문에 놀랐는지, 리오르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한 걸음 물러섰다. 말을 건 사람이 릴리트라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그녀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리오르를 보며 생글생글 웃었다. 뒤늦게야 그녀에게 인사를 하던 리오르는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릴리~, 좋은 일이라도 있어? 오늘따라 표정이 밝네에~!”
“당연하지! 어제 집에 가서 이것저것 디자인을 해봤거든? 리오에게 어울릴 것 같아서 얼른 빨리 재봉하고 싶어~.”

잔뜩 들뜬 릴리트의 표정에 리오르는 그런 옷은 안 입어도 될 것 같다며 거절하기가 어려워 그저 웃음으로 상황을 넘어가기만 했다. 그들은 같이 교실로 먼저 올라가기로 했다. 마법에 대해 이야기를 해서 그런지, 대화의 주제는 자연스럽게 꿈 이야기로 흘러갔다. 리오르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만 있던 릴리트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눈을 빛내며 양손을 덥썩 잡았다. 그녀가 갑자기 손을 잡아오자 놀란 그는 허리를 뒤로 주춤거렸다.

“그럼 이제 두 마법사의 숙명적인 라이벌 같은 게 생기는 거야!?”
“에트가 예지몽일 수도 있다고 했으니까…. 그 애가 마법사일지는 모른다고 했어.”

책상에 가방을 내려둔 그들은 자리에 앉았다. 교실로 아이들이 점차 들어오기 시작하고, 운동장에 학생들은 비어간다. 듣는 귀가 많아져서 목소리를 낮춘 릴리트가 다시금 입을 열려고 할 때, 타이밍 좋게 종소리가 울린다. 교실 문을 열고 담임선생님이 들어오고, 간단한 조회 시간이 시작됐다.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오늘 특별히 소개할 사람이 있다고 언급한 점. 들어오라는 선생님의 목소리에 다시금 교실 앞문이 열렸다는 점이다.

“영국에서 전학 온 아스테르 해서웨이예요. 멀리서 온 친구니까 다들 사이좋게 지내야 해요?”

담임교사의 옆에 붙어선 아스테르는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리오르는 처음 보는 전학생을 바라보다가, 문득 시선이 마주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 그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그가 계속해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선을 거두어야 하는지, 망설이던 리오르는 이내 눈동자를 굴리다가 고개를 숙였다. 곧 릴리트가 옆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저 애, 리오를 엄청 노려보는 것 같은데?”

조금 전의 생각은 단순히 리오르의 착각이 아니었다. 릴리트까지 그렇게 생각할 정도니까 말이다. 아는 애야? 그녀의 물음에 그는 고개를 저을 뿐이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저렇게나 차가운 시선을 받는 것은 가시 방석에 앉은 기분과도 같았다. 불현듯 리오르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장면에, 그는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전학생은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고, 이번에는 리오르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분명 처음 듣는 이름에 외모이다. 그런데도 낯설지 않은 표정에 눈동자는 곧 꿈을 연상하게 했다. 꿈속에 나온 인영, 날카로운 눈빛으로 응시하던 시선. 혹시 꿈에 나온 소년이 지금의 전학생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다시금 인영이 또래로 보였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무수한 잡념 속을 헤매던 도중, 그 맥을 끊으려는 듯 선생님의 목소리가 리오르의 머릿속에 콱 박힌다.

“마침 리오르 뒤에 자리가 비었네. 아스테르는 저기 앉도록 하렴.”

거짓말…! 리오르는 당황한 얼굴을 가리지 못한 채 애써 속으로 울고 있는 것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꿈에서 소년이 나쁘게 행동한 것은 아니었지만, 타국에 전학 온 첫 날부터 처음 보는 자신에게 무서운 시선을 쏘아 보내는 것은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아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기에 미리부터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하지만. 그래…! 아직 꿈속의 그 애가 아스테르라는 게 확실하지는 않잖아? 게다가 리오르한테 무슨 짓도 안 했고! 그는 애써 스스로를 달래며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용기를 내어 쉬는 시간에는 자신을 리오르 하이리히라고 소개까지 했다. 아스테르는 처음 소개했을 때도 들었을 이름을 한 번 더 소개하는 것을 끝으로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릴리트는 처음 낯선 곳에 와서 적응을 못하는 것일 수도 있으니 괜찮다며 리오르를 위로해주었다.

결국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제대로 된 대화 한 번 못해본 리오르가 아스테르와 대화할 기회가 찾아온 것은 식사를 마치고 난 이후였다. 운동장 주위를 돌며 가볍게 산책을 하고 있던 리오르를 아스테르가 불러낸 것이다. 학생들이 잘 다니지 않는 건물 옆 쪽으로 불러낸 것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으나 리오르는 순순히 그를 따라갔다.

“너지? 마기아 카드를 들고 있는 게.”
“그, 그걸 어떻게 알았어…!?”
“내놔. 그건 네가 들고 있을 게 아니야.”

아스테르는 다소 강압적인 어투로 이야기하며 리오르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는 카드를 보호하려는 듯 카드를 넣어둔 주머니를 감싸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에 아스테르는 한 걸음 더 다가선다. 어서. 재촉하는 목소리에는 미묘하게 짜증이 묻어났고, 그는 자리를 쉽사리 뿌리치고 도망칠 수 없었다. 분명 별의 수호자 에투왈은 그를 주인으로 인정했고, 카드들에게 완전히 인정을 받기 위해 시험을 치를 자격이 있다고 얘기했다. 그런데 그런 카드의 존재를 알고 있고, 그것을 이제 와서 내놓으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등장하다니. 이로써 리오르는 꿈속에 나왔던 소년이 지금 제 눈앞에 서있는 전학생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하지만…! 에트가 리오르를 카드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카드의 시험도 치를 자격이 있다고 했단 말이야!”
“에트? 별의 수호자 에투왈을 말하는 건가? 일주일 사이에 벌써 시험을 시작했단 말이지….”

하아. 낮은 한숨을 내뱉던 그는 뻗었던 손을 거두고 멍하니 서있는 리오르를 지나쳐 가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앳된 목소리에도 서늘함이 묻어날 수 있다는 것을, 리오르는 그때 처음으로 알았을 것이다.

“에투왈이 인정해줬다고 기고만장한 모양인데, 넌 카드의 진짜 주인이 될 수 없어. 마지막에 그 카드를 손에 넣는 건 내가 될 테니까 각오하고 있어.”

리오르는 아스테르가 그 자리를 완전히 빠져나가기 전까지 멍하니 그 자리에 계속 서있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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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가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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